아이디어와 실행
몇 주 전 상위 기획서를 작성하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다. 생각하고 도전받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힘든 것보다 몰입하고 창조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고 보고가 잘 끝났을 때에는 묘한 성취감도 있었다.
그런데 이후 실행 단계에 돌입하자 현타가 왔다. 아이디어는 저기 높은 산에 올라가 있는데 현실은 한참 밑에서 아직 운동화 끈도 못 매고 있는 것 같아 무력감이 들었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릴 땐 한 번에 짠! 하고 만들어낼 수 있지만 실제로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은 짠! 하고 될 리가 없다. 큰 아이디어 외에 수많은 로직과 정책을 만들어야 하고, 당장 기술로 구현이 어려운 부분은 사람 손으로 한땀 한땀 운영도 해야 한다. 기획에서 실행으로 넘어가려니 햇살이 반짝거리는 넓은 바다에서 놀다가, 어둡고 긴 터널로 터벅터벅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실행 단계에서는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 이건 이러하니 이렇게, 저건 저러하니 저렇게...매순간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순발력 있게 최선의 결정을 하는 일 또는 그 결정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남을 설득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느꼈다.
빠르게 최선의 판단을 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중심, 철학이 있어야 한다. 돌이켜보니 이전 단계에서 화면과 기능에 집중하느라 서비스의 본질, 철학에 대해 더 깊게 고민을 못한 것 같다. 서비스 철학, 제공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가 명확하면 힘주어야 하는 화면과 기능이 자연스럽게 딸려 나올 것이다.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도 단단한 기준이 되어 줄 것이다.
아이디어와 실행은 결국 한몸이었던 것이다. 전자는 크고 중요한 것, 후자는 작고 사소한 것이 아니라 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두 개가 따로 떨어져 하나는 반짝거리는 바다, 다른 하나는 어둡고 긴 터널이 된다면 일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획자는 아이디어와 실행,두 가지 모드를 능수능란하게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천체망원경 스케일로 때로는 초정밀현미경 스케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들여다봐야 한다. 정신적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한 일이다. 관심과 애정 없이 의무감만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한동안 일이 재미없다고 느꼈던 이유는 첫째, 실행 단계가 아이디어 기획 단계와 동떨어진 사소하고 지루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둘째, 결국 모든 건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게 어떤 이유에서건 약해진 것. 이 두 가지 였다. 그럼 다시 재미있게 일하려면?
어떤 문제에 어떤 순서로 관심을 둘지 잘 조절하면 된다.
내 관심 자원을 어디에 어떻게 쏟느냐에 따라 사소하지만 위대한 발견, 새로운 연결이 만들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