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서랍장

인연 4-도촌언니

by 안현희 마리스텔라

도촌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되면 시청에 들러 책도 보고 산책도 하자고 했다. 마침 정자역 근처에 볼일이 있어 서둘러 일을 마치고 언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아파서인지 조금은 여윈 모습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을 뿐인데, 순간 나이의 무게가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의 얼굴에는 세월이 남기고 간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하지만 언니의 눈빛 속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순함이 드러나 있었다.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2013년 무렵이다. 같은 학과도, 같은 학년도 아니었지만 화장실에서 몇 마디 나눈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집 방향이 비슷해 모란까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간 것이 지금까지 인연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인연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사람이 의외로 오래도록 곁에 머무르기도 하고, 반대로 오래 함께하길 바라던 사람이 서서히 멀어져 잊히기도 한다. 인연은 노력만으로 이어지는 것도, 우연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닌 듯하다. 어쩌면 서로의 삶의 결이 맞닿는 순간, 마음의 문이 열리며 비로소 ‘인연’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청 근처를 걸었다. 하늘빛이 차분해진 가을, 풍성하게 피어난 가을꽃과 정원 중앙에는 노랗게 빛을 내뿜는 계수나무가 서 있었다. 달콤하게 퍼지는 향기에 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나는 계수나무를 좋아한다. 빛깔이 곱게 물들며,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부드럽고 달달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언니는 잠시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쉬었다 가자며 자리를 권했다. 그 순간, 바람이 지나가며 계수나무 잎사귀들이 반짝였다. 향이 더 짙어졌고, 우리는 말없이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았다. 계절과 향과 침묵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이 공간은 언제 와도 나를 편안하고 좋은 기운으로 채워준다. 봄에는 찬란한 봄꽃들이 가득하고, 가을에는 따스한 햇살과 곱게 번지는 가을빛이 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친구와도 종종 찾는 곳이다. 날씨가 좋은 날엔 김밥과 음료를 챙겨 와 그림도 그리고, 소풍 나온 듯한 기분으로 영어 공부도 한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도심 한가운데서도 자연의 품에 안긴 듯 마음이 느긋해진다. 집 가까이에 시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도시의 속도에 지치기 쉬운 날들 속에서, 이곳은 나에게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작은 휴식처가 되어준다.

시청은 365일 개방되어 있어 축제도 즐기고, 좋은 강연도 들을 수 있으며, 북카페에서 책을 읽는 재미도 있다. 한 번은 표를 사서 점심을 먹어본 적도 있는데, 의외로 꽤 맛있었다. 언니의 집 근처 산책길도 매력적이다. 야탑 탄천과 여수천으로 이어진 길은 사계절이 뚜렷해 지루하지 않다. 여름이면 초록이 푸르게 자라나고, 겨울이면 물빛이 투명하게 가라앉는다. 오늘도 언니와 걸으며 하루의 남은 에너지를 충전한다. 이렇듯 삶의 어느 한쪽 구석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

언니는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힘들 땐 괜히 이곳에 오게 돼. 향도 좋고, 사람도 많지 않고, 마음이 조금은 풀리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말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공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다. 그리고 그 곁에 오래된 인연이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시간과 계절이 흘러도 서로의 온기를 기억하는 사람, 다시 만나 웃으며 걷는 그런 관계가 인생의 진짜 선물 아닐까. 가을빛이 조금씩 번지는 오후, 언니와 나는 그렇게 편안한 가을 길을 즐기며 걸어가듯 은은하고 향기로운 인연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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