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서랍장

인연 1-몽골 언니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머릿속에 수많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어느새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과 뇌 한편에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때로는 그 기억이 가슴을 저미는 슬픔으로, 때로는 햇살처럼 따스하게 스며드는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온다. 일상에서 문득 떠오른 기억은 더 깊은 그리움이 되었다가, 한편으로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을 평소에는 마음 한구석에 단단한 자물쇠로 잠가둔 채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날, 마음의 문이 살짝 열릴 때면 그 감정은 조용히 스며들어 회색빛 우울, 아물지 않은 상처로 조심스레 얼굴을 내민다. 그럴 때면 마음에 눈물이라는 작은 강물이 고요히 흘러내린다. 그 눈물은 아픔의 증거이자,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투명한 흔적이다.


2010년,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도예 수업에서 몽골인 언니를 처음 만났다. 비슷한 성향 때문이었을까? 우리의 인연은 2020년, 그녀가 암이 전이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언니는 30대 후반부터 암 환자로 방사선 치료와 약물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몇 해가 지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약간 어색한 말투만 빼면 환자라는 생각도, 외국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언니는 몽골의 학자 집안 출신이었고, 동생도 교수로 한국을 오가며 지냈다. 본인 역시 똑똑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언니는 8년간 러시아에서 유학하며 한국인 남편을 만났고,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언니는 언제나 밝고, 삶에 대한 감사와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도 방송통신대학교에 다니며 꾸준히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의료통역을 하거나 힘든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가 “현희야, 무서워.”라고 말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10여 년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아프다는 말, 무섭다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한 적이 없던 그녀가 어느 날 무섭다는 말을 했고, 근심 어린 얼굴을 보였다.


나는 언니가 마음의 안정을 취하길 바라는 마음에 피아노 배우기를 권했다. 흔쾌히 응하는 언니의 손을 이끌고 내가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서 상담을 받았다. 언니는 바이엘부터 즐겁게 배웠고, 한 권이 끝날 때마다 자랑했다. 바이엘이 끝나갈 즘 언니는 “곧 체르니로 넘어갈 수도 있겠네.”라며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밝은 얼굴과 달리 몸에는 암세포가 가득 퍼져 있었고, 복수가 차올라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고, 도서관에 다니고, 여행하고, 많은 시간을 걸으며 나누었던 고민과 삶에 대한 이야기.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던 모습. 언니는 내 삶에 큰 본보기가 되어준 사람이었기에, 가족을 잃은 듯한 슬픔에 1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경연 작가의 『인생의 겨울이 남긴 것들』에 나오는 ‘낯선 별 여행자’처럼, 그녀는 내 곁에 10여 년을 머물다 소중한 인연으로 남았고, 내 마음 한쪽에 잊히지 않을 추억이 되었다. 죽는 순간까지 피아노를 배우며 삶의 열정을 다했던 사람, 아파도 환자티를 내지 않고 늘 웃던 사람, 그런 만남이 내게는 큰 자산이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내게 힘이 된다. 내가 겪은 경험과 만남은 아픔이 아물어 딱지가 되고 굳은살이 박이듯, 어떤 상황도 피하지 않고 맞서는 힘을 채워주었다.


그래서일까? 무엇을 배우는 것에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내 삶을 돌아보면 하루하루가 소중한 경험과 인연으로 가득한 선물임을 느낀다. 새로운 만남이 소중하듯, 지나간 소중한 인연 역시 오래도록,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늘 내게 희망의 아이콘인 그녀를 가슴속에 고이 묻어두고 기억할 것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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