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은 내 삶의 중심이지만,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도 모든 것을 나누고, 나의 약점마저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으며, 오히려 그런 나의 약함을 자신의 아픔처럼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K와는 우연히 하굣길을 함께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어느 날 K의 집에 들르게 되었는데, 한 지붕 아래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오래된 집, 하나뿐인 화장실, 비 오는 날이면 양동이와 대야로 빗물을 받아내던 풍경이 내게는 한 편의 영화처럼 감성 가득한 장면으로 남았다. 이승철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흐르던 그날의 기억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감탄했던 그 풍경이 K에게는 아픔이었고, 지하를 포함한 2층짜리 양옥집에 살던 내가 부러웠다고 고백했었다. 그러나 내게는 K가 부끄러워했던 그 모든 것이 조금의 흠도 아니었고, 오히려 돈 주고도 사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친구 집에서 함께 시험공부하던 날들, 봄이면 꽃구경을 나가고, 친구 손에 이끌려 디자인 학원에 다니던 기억, 학력고사 세대인 내가 K의 권유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수능을 준비해 시험을 치렀던 도전, 비 오는 날 함께했던 종점 여행, 친구가 짝사랑하던 남학생을 위해 경찰대학 담 너머로 선물을 전해주던 아찔한 경험, 술에 취한 K를 집으로 데려와 재우고, 과음의 흔적으로 이불을 빨던 일화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추억이 우리 사이에 쌓였다. 그녀는 내 월급을 봉투째 두말없이 빌려줄 수 있는 친구였다.
우리는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에 나오는 구절처럼,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아 김치 냄새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은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을 털어놓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친구, 악의 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도 뒤끝이 남지 않는 친구,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를 북돋아 주는 그런 진실한 친구가 되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사소한 서운함이 발단이 되어, 35년 지기 친구와는 어느덧 연무처럼 멀어져 버렸다. 그동안 작은 오해로 잠시 멀어진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외향형인 내가 먼저 내향형인 K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K에게 연락하지 않고 있다. 그 시간이 벌써 3년이 흘렀다.
여동생 결혼식에 와서 사진까지 찍어주던, K를 잘 아는 동생이 물었었다. 왜 K와 만나지 않느냐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얼른 화해하라고. 소중한 친구인데, 괜찮겠냐고 물었을 때, 상관없다고 다른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라고 대답은 했지만 내 마음엔 무거운 바위를 뚫고 소리 없는 한마디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거짓말이야.’ 상관없지 않았다. K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 빈자리가 내 삶을 조용히 흔든다. 언젠가 다시, 비 오는 날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이승철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기를, 옛 추억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조용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