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만큼만 할래? 요만큼만 할래.

by 곰고미

얼마 전, 지인을 만나 밥을 먹었다. 그분도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했다.

"브런치는 글 쓰는 사람은 많은데, 글 읽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앗. 그래도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나를 표현하기 위해, 일단 쓴다.)


그리고 브런치에서 볼 수 있는 80년대생들이 진짜 열심히 산다고 했다.

강박적일 정도로.

나를 보니 그걸 더 잘 이해하겠다고 했던가?


생산적이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

생산적이지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왜 이렇게 죄스럽고 불편한지,

오래 전부터 궁금했으니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관련 책도 읽어보고(참으로 '생산적으로' 비생산성을 연구하는 아이러니),

친구들과 이야기 나눠보고, 상담에서도 다뤄보는 중이다.


그러던 중 상담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국은 1970년대부터 50년간 자아를 팽창시키라고 요구해 왔어요. 돈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63층 빌딩을 지어야 하는 거죠."


1985년에 완공된 63빌딩. 한국의 경제성장과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그 건물.

문자 그대로 빌딩을 지으라는 게 아니었다. 더 높이, 더 크게, 더 많이. 그게 곧 성공이고, 가치고, 존재 증명이었다는 거.


"더 해야 돼. 더 잘해야 돼. 능력이 있으면 증명해야 돼."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디선가 계속 들어온 말 같았다.


숨을 고르고 가도 되는 순간에도, 자주 숨을 멈춘 채 달렸던 게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라가 너무 빠르게 커졌고, 그 속도에 맞추는 게 ‘정상’이 된 시기가 길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이만큼 할 수 있어’가 보이면, ‘그럼 이만큼 해야지’가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외부에서 요구하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그렇게 굳어진 사람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貪)처럼, 자아는 더 더 더 원하는 것이 기본 속성이다.

‘아, 그럼 여기까지는 할 수 있겠네’가 아니라

‘그럼 여기까지는 해야겠네’로 기준을 슬쩍 높인다.


그 안에서 자아는 계속 팽창한다.

더 크게, 더 높이, 더 많이 담아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요즘 더 자주 붙잡히는 건, ‘내 몸에 무엇이 딱 붙어 있는가’이다.


나는 청소년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내가 요구한 만큼을 살았다.

(지금 돌아보면 ‘허황된 기대’라기보다 거의 ‘자기 착취’에 가까운 요구였다.)


그때의 나는 아프고 예민했고, 나를 몰아붙이던 그 감각은 20대, 30대에도 몸에 남아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다음 목표가 바로 생겼다.


하고 싶어서 한다는 감각으로 뭘 하는 게 아니라, 해야 돼서 해내면서도 불만족스럽고,

해내고 나면 또 다음 과제를 찾고, 한계를 모르니 만족도 알 수 없는 채로 달려왔던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왜 그렇게… 왜 그렇게까지 하고 살았지…?’

스스로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요만큼만 할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참 이상했다.

신기했고, 때론 얄미웠고, 가끔은 화가 났다.


왜냐하면 내 세계에서 ‘요만큼’은 늘 임시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너무 나쁘거나, 시간이 진짜 없거나, 어쩔 수 없을 때만 허락되는 최소치.


평소의 나는 ‘밭이 있으면 안 놀리는 사람’에 가까웠다.

뭐라도 심어놓고, 심어놓고도 짜증 내고, 또 후회하는 사람.


그러니 ‘요만큼만’이 가능한 사람을 보면, 내 안에서 이상한 계산이 돌아갔다.

(저 사람은 왜 저래?)

(저렇게 해도 불안하지 않나?)

(그럼 나는 지금까지 뭐 한 거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비교가 아니라 투사였던 것 같다.

나도 “요만큼만” 하고 살고 싶었는데,

내 안의 어떤 규율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누가 내 앞에서 그걸 해버리면, 부럽기도, 화가 나기도.

내가 나에게 못 하는 걸 남이 하고 있으면,

그건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어떤 모욕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힘들어요. 나 버거워. 좀 쉬었다 할래.”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감지돼서 나와야 조절을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 채로 너무 오래 살아왔다.

나를 몰아부치며 일을 하다가 팍 고꾸라지는 걸 반복했고, 회복하는 힘이 많이 약해졌다.


상담을 받으면서 그걸 조절하는 감각을 키워가는 중이다.


한동안 달리기를 하면서 “더 하고 싶은데 멈추는 연습”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멈춤은 의외로 나를 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날을 살게 했다.


그러니까 내가 배우고 싶은 건 ‘요만큼’ 그 자체가 아니라,

멈출 수 있는 사람의 내부 감각이다.


그래서 요즘 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왜 나는 요만큼만이 안 될까?”가 아니라

“내 안에서 요만큼만을 금지하는 건 누구일까?”


나는 오랫동안 ‘더’로 나를 증명해왔다.

열심히 했고, 해냈고,

그 과정에서 몸이 붙잡히는 느낌도 익숙해졌다.

(조용히 아프고, 예민하고, 불안한 상태로도 그냥 굴러가게 만드는 기술.)


그런데 그 기술이 이제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더는 ‘더’가 삶을 확장시키지 않고,

오히려 삶을 좁히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말을 배우는 중이다.


“이 정도면 됐어.”

“나 오늘은 여기까지.”

여기까지만 할래.


내 몫과 한계를 아는 말, 내 몫과 한계를 정하는 말을.

그래. 난 요만큼만 할래.


매거진의 이전글그거나 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