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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스타 KM Apr 11. 2021

힘이 되어준 최고의 위로

코로나 속에서...층간소음 그 이후...

힘든 상황에 처하면 주변 관계에 옥석이 가려진다.
주위 사람을 잃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을 얻게 되기도 한다.
힘든 순간조차 무조건 잃기만 하는 것은 없다.
무언가를 잃기도 하고  무언가를 얻기도 하는 것.
인생은 그러한 것인가 보다.


흔히 인생을 날씨에 비유해서 얘기하곤 하는데 나의 지난 몇 달 간의 일도 그것과 비슷했다.


# 그날 밤은 고요했다


최근 울한 일을 겪으면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간 층간소음으로 인해 1년 이상 시달렸고, 집 렌트 만기가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이사를 하였다.

우리나라의 포장이사는 이 곳에 비하면 최소 몇 년은 앞서 있는 시스템이라는 걸 이 곳에 오고 나서 알았다. 이 나라의 이사는 옛날 우리나라 이사와 비슷하다. 빈 박스에 직접 짐을 하나하나 종이나 비닐로 포장해야 한다.

이사하는 것은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세 달 전부터 집을 알아봐야 했고, 이사업체를 선정해야 하며, 핸드오버 전에 집을 이사 오기 전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오로지 이 곳에 살고 있는 가족의 몫이었다. 남편은 한국에서 회사일 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란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이사 전날 밤에 오기로 되어있었다. 이사를 하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사를 도울 마음으로 왔다.

이 곳은 코로나의 안정세를 보이면서 점점 단계를 풀고 있던 11월이었다.

남편이 오던 날, 지난 7월에 그랬던 것처럼 나와 아들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남편은 이사 계약서를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보여주고 이사할 새로운 집에서 자가격리를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집에 머무르며 이사를 해도 되냐고 물었고, 그들은 '오케이'했다. 그런 절차를 밟은 후, 자정이 다된 시간이 돼서야 공항 밖으로 나왔고, 나와 아들은 남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남편은 이사할 새로운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내고 자가격리를 시작하였다.

다음 날 나와 딸은 새벽부터 일어나 이삿짐의 마지막을 정리하였고 이사는 아침부터 진행되었다.

낮 2시가 넘어서야 이사할 새로운 집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 바람이 휘몰아쳤다


문제는 이사하는 날 발생되었다. 첫 이삿짐이 들어오기도 전에 자가격리를 점검하는 출입국관리소의 직원들이 왔고, 이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은 확인받은 내용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몇 십분 후, 그들이 가고 다시 온몸을 무장을 한 직원들이 와서 남편과 발코니에서 1시간 정도 얘기한 후, 남편은 가족과 있으면 안 된다고 11월부터 규정이 바뀌었다고 했다. 집에서 자가격리를 할 수는 있지만 가족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자가격리시설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공항에서 확인받은 사항이라고 이사 서류를 보여주고 했지만 그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남편은 자가격리시설로 바로 이동했다.

이사하는 집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사도 중단시켰기 때문에 백 박스가 넘는 짐이며 가구들 모두 집안에 내팽개쳐서 있었다.

그 후, 자가격리를 잘 마쳤고, 우리 식구는 정부의 조사를 받았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기에 다시 이 기억을 꺼내는 것이 아직도 나에게는 아픈 일이다.

코로나는 우리의 생활에 보다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 구름이 걷힐까


이 일은 조사받을 때 조사원은 우리에게 2월이면 마무리돼서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하였지만 사원의 말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11월부터 지금껏 국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변호사를 선임했고 이 일은 아직도 해결 중이다. 


왜 그들은 공항에서 오케이 하였으며, 그로 인해 진행된 이사를 왜 우리의 잘못으로만 돌리는지 억울했다. 공항에 수도 없이 많은 cctv가 우리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하는데 왜 그들은 그걸 오픈하지 않는 것인지 그 또한 억울했다.

공권력이 강한 나라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생에서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하게 하고, 개인은 그것 앞에 너무 하찮은 존재임을 깨닫게 했다.




# 또다시 햇살이 비추었다


이웃집 찰스가 남편에게 전화가 해왔다. 주변의 지인들도 우리의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냐며. 무슨 일이냐며.

찰스의 전화는 나와 남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찰스는 남편에게 ‘내가 너희를 그동안 봐왔고 너희에 대해 잘 알잖아. 너희는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억울한 마음일 것 같아. 함정에 빠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고맙게 그는 우리의 말을 더 신뢰했으며 우리의 편에서 마음을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찰스는 거기서 위로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내가 너희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며 그런 것에 대한 진술서가 필요하면 내가 해줄테니 언제라도 얘기해. 우리 부부가 너희를 도움 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라고 이야기를 했다.

고맙다 못해 그들은 우리에게 감동이었다.

무엇을 당장 해준 것이 아닌데도 마음에 위로가 됐으며 그 위로는 힘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위로의 말이었다.


그 후, 찰스와의 인연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찰스는 우리가 7년 전 여기 왔을 때 같은 콘도에 살던 이웃이었다. 나는 이웃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는 항상 마음을 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 고마웠다. 그러고 나니 그의 행동이 다시 보이는 것들이 여러 군데서 나타났다.

찰스가 어떤 사람이던가, 남편이 프로모션 됐을 때도 진심으로 축하를 해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찰스는 평소 유머러스했지만 그의 말은 항상 진심이었고, 따뜻한 마음이 있는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진가를 늦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힘든 상황이지만 괜찮은 사람을 얻었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좋은 에너지를 받기도 한다.  

위로라고 하는 것은 관계에 비례하는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위로의 말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지인들의 형식적인 위로에 말은 오히려 상처만 남긴다.

찰스의 말이 최고의 위로가 된 것은 의례적인 위로의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방법으로 돕겠다고 한 것에 대한 마음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시련과 좌절이 온다. 모두에게 현재는 그런 과정을 넘어왔기에 존재하는 오늘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을 넘지 못하면 그런 트라우마 속에 생활하는 것이고, 그것을 견디고 극복하면 더 강하고 단단한 내가 된다. 위기를 경험해 본 사람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더 크게 성장한다는 말을 믿는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휘어질 수는 있어도 부러져서는 안 된다.

이 일이 잘 해결될 것이고 우리는 지금보다 성숙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의 주변에 시련이 오는 경우가 있을 때 나도 꼭 찰스처럼 진심 담긴 말을 건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은 마음이고 그 마음은 힘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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