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9년 차 - 여전히 ing
지난 한 달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행복감에 시간이 꿈처럼 흘러갔다.
남편은 코로나 상황을 뚫고 얼마 전 싱가포르에 왔다.
6년 전 우리 가족은 남편의 직장으로 싱가포르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초 남편은 직장으로 인해 다시 한국에 가게 되었다. 식구 모두 다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면 좋았겠지만 큰 아이가 전학이 되지 않는 나이라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우리를 타지에 남겨 놓고 가는 마음이 편치 않은 남편은 한 달에 한 번은 오겠다고 했지만 코로나의 상황이 심해지면서 우리 가족은 그렇게 떨어져서 한 달, 두 달, 석 달 그리고 넉 달째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지구촌인 지금 '거리(distance)' 보다는 '비행시간(Flight time)'이 중요한 거라고. 싱가포르에서 한국은 자동차로 서울에서 부산 가는 시간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자주 볼 수 있을 거라 했지만 코로나란 장벽으로 막혀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거리와 비행시간의 괴리감을 매일매일 실감했어야 했다.
남편이 비행기표를 예매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떨리고 기쁘고 흥분되고 그랬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상황이 생각보다 길게 장기화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만남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정말 만날 수 있는 것인지 얼떨떨했다.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행복한 탑을 쌓았다가 이번에는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탑을 허물어 버리기가 일쑤였다.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생각보다 너무 힘든 것이었다.
남편을 만나러 마중가는 길이 너무 설레었다.
결혼 19년 차
아직도 남편을 만날 때 설렌다고 하면 우스개 얘기로 심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남편을 그만큼 좋아하고 사랑한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여기서 생활하면서도 남편의 퇴근시간에 맞춰 종종 마중 나가곤 했다.
커피를 마시며 그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그가 환히 웃으면서 들어오는 모습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누구나 연애에 대한 풋풋한 감정과 순수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99년이었던가 우리가 연애했던 그 해에도 장마로 인해 대교들이 물에 잠기고 그로 인해 전철이 중단이 된 적이 있었다. 목동과 회기동을 오가며 매일같이 만났었지만 그 날은 너무 많은 비로 못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빗 속을 뚫고 우리 집 앞으로 왔다. 집으로 온 전화를 받고 서둘러 나갔다. 그때부터 내 기억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그려진다. 우산을 쓰고 하얀 봉지를 들고 서 있는 그가 있었다. 빗물에 군데군데 젖은 옷차림으로. 내가 좋아하는 빵을 사 가지고 와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비에 젖은 바지단, 빗물이 묻은 손, 빗물이 튄 안경, 그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 어설펐지만 순수했던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빗속을 가르며 왔던 20여 년 전과 지금의 상황이 오버랩이 되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안다.
어둠이 짙은 한밤 중 썰렁한 공항이었지만 나의 마음은 남편이 오기 며칠 전부터 대낮이었다.
공항에 게이트가 열리기도 전에 나는 남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열 체크, 설문지 작성 등을 위해 서 있는 남편을 보니 정말 우리가 다시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가족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가족은 몇 년만의 만난 가족처럼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포옹을 했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이렇게 건강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에.
1997년 5월 나는 그와 만났다.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와 남편은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서로를 알아가다 보니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니까 서로를 맞추게 되었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나에게 그는 그 무엇보다 큰 의미의 사람이 되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수도 있었다.
시간에 쫓기듯 바쁘게 살았을 때는 그의 장점을 보기가 어려웠다. 생활 속의 일들에 묻혀 그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내가 있었다. 마치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에선 길가에 핀 꽃들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나는 그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나의 마음도 더 성숙해졌다.
그러한 세월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서로에 대한 마음의 깊이가 생겼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때론 서로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였다. 서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동감을 불어넣으면서 자신감 있는 삶을 살게 해 주었다. 알고 보면 애정 아닌 것이 없었다.
나의 삶에서 그는...
나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감사한 사람
소중한 사람
선물 같은 사람
그는 자가격리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지금 또다시 자가격리 중이다.
우리는 다음번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코로나 이 시기를 견디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자주 만날 수 없음에 너무 힘들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이 서로에게 의지하고 희망을 주면서 서로 다른 공간에서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지금을 지나고 있다.
삶이 긴 것 같이 느껴지면서도 짧고 지금 같은 시기에는 그 어떤 때보다 길게 느껴진다.
남편을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그를 생각하는 나는 행복하다.
행복함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마음속에 탑을 쌓는다.
나는 저 황홀한 피리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러나 모른다, 그것이 누구의 피리인지는.
여기 등불 하나 환히 밝혀 있다.
심지도 기름도 없이.
물 위에 수초 한 포기가 피어난다.
밑바닥에 뿌리 내림도 없이.
한 송이 꽃이 피어날 때,
수천 개의 꽃이 함께 피어난다.
달새의 머리는 온통 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비의 새는 오로지
다음번 비가 언제쯤 내릴까 하는 것.
그대가 온 생애를 바쳐서
찾고 찾아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15세기 인도 시인 까비르(류시화 시인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