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관하여
나에게 아이의 사춘기는 장마와 닮아 있는 느낌이다.
장마가 그만 끝났으면 하는데 오늘도 비가 오고 내일도 비가 온단다. 올해 장마는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데 검푸른 하늘은 알지 못한 채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가뭄을 덮고도 남을 홍수가 한차례 휩쓸고 가면 그제야 장마가 끝을 보인다. 장마는 소나기의 시원함도 없고 비의 운치도 갖고 있지 않지만 이 여름을 나려면 장마를 지나야 한다. 아이의 사춘기도 그러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즐거움은 사랑, 행복, 즐거움, 그 어떤 미사여구를 다 가져다 써도 모자람이 없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머무는 것. 이것이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다. 이런 내가 아이의 사춘기와 마주했을 때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남편의 직장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로 오게 되었다. 첫째 아이는 이미 초등학교의 고학년이었고,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이에 싱가포르에 왔다. 싱가포르의 공교육은 대부분이 성적에 의한 서열화가 되어 있다. 싱가포르는 초등학교 6학년 하반기부터 중학교로 가는 입시 즉, PSLE라는 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 결과를 통해 성적순대로 중학교에 입학한다. 대체적으로 그 성적에서 큰 변화를 가지고 오지 않고 대학교까지 진학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아이는 4학년 하반기에 입학하여 열심히 학교 생활을 했다. 친구들에게도 인기 많고 학교 생활도 안정적으로 했다. 그 결과가 좋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좋은 반에 편성되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줄곧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나는 이 곳에서도 힘들지만 잘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이는 서점에 나온 문제집을 거의 다 풀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아이는 말처럼 달리고 달렸다. 그래서 아이는 여기에 온 지 2년도 안돼서 PSLE라고 하는 입시의 산을 첫 번째로 넘었다.
국제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서 언어의 장벽을 넘어 단 시간 내에 좋은 성적을 얻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훨씬 더 많은 공부의 양을 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아이의 결과는 좋았고 입시와 함께 사춘기도 무난히 지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던 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한 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의 의견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았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때론 말대답을 하면서 나의 속을 후벼 놓았다. 대학생이 된 것처럼 공부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하는 동호회 활동과 영화, 친구들, 인터넷 이런 것들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사춘기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이해했다. 입시를 치르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싱가 포리언 중학교 1학년들에게 나타나는 흔한 증상이라 생각하며 아이에게 휴식도 있어야 할 거 같아서 이해하고 참았다.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2학년도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3학년 때 제일 심해졌다. 나의 분노와 잔소리도 같이 심해졌다.
하루하루 계속되는 장마처럼 아이의 생활도 계속되었다. 3년의 시간 동안 우리의 관계는 굴곡을 보였고 나는 시간을 해결책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좀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어서 빨리 장마가 끝나고 뜨거운 햇살 받으며 여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상처들이 서로에게 벽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간이 반복이 되면서 우리는 서로의 고통에 대해 만성이 되었다.
사춘기의 과정은 그러했다. 아이가 자아를 찾고 싶어 하는 그때, 질풍노도의 시기인 그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질 않았다. 나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예민하고 반항하고 싶은 마음을 표출하는 아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변화가 두려웠다. 아이가 공부의 때를 놓칠까 하는 두려움도 컸었다. 나는 잔소리로 아이를 통제했다.
그러다 아이가 얼굴이 붓고 급격히 체중이 늘기 시작하면서 건강에 이상이 온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아이는 갑상선에 이상이 왔고 그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진단받았다.
아이는 입시를 준비하는 2년 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냈기 때문에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기와 맞물려 사춘기와 여러 가지의 스트레스가 아이의 병을 가져왔다.
돌아오는 길에 나와 아이는 침묵했고 나는 그날 밤 잠자리에서 울고 또 울었다.
미안한 마음에. 자책감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밤이었다.
장마와 같았다. 비가 계속 내리는 날들이었지만 그날 밤은 유난히 더 많이 내린 밤이었다.
아이가 늘 기대치에 맞게 잘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어리석고 자만한 사람이었나 보다.
나는 아이에 대한 기대감을 칭찬과 격려로 포장하며 아이에게 부담감을 주었나 보다.
그런 기대감이 가져오는 부담감과 두려움은 괜찮다고 생각하며 모른척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는 변화를 두려워했다. 아이의 변화가 가져올 나의 변화를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랬어야 했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나의 기대와 통제가 아닌 아이 자신의 삶을 주도하면서 스스로 성장하게 응원했었어야 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것에 대한 중압감이 커서 스트레스가 더 많다는 것까지 이해했었어야 했다.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하며 나의 잔소리를 줄였어야 했다.
그 후, 아이와 나는 진솔한 얘기를 했다. 아이는 싱가포리언 사이에서 그동안 힘들었던 학교 생활 같은 것을 토해내며 많은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냈다. 자신의 스트레스가 사춘기와 함께 오면서 더 힘든 점도 이야기했다.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를 때가 있다는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잔소리에 대한 나에 대한 불만도 꺼내놓았다.
아이가 하는 말에서 나는 어떤 부모인지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나를 알고 나니 내 마음에 평정심이 느껴졌다.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였다. 그럴 수 있다고. 괜찮다고. 잔소리와 통제가 아닌 이해와 격려를 하면서 나는 아이와 나를 서서히 분리했다. 처음엔 허전함이 느껴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게 편안해졌다.
장마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이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젠 그 두려움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무엇이었나. 사춘기와 함께 온 아이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결국 나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나 보다.
아이를 사랑하니까 아이가 아파하고 좌절하고 힘들어할까 봐 걱정은 되지만 여름의 장마처럼 이 시기를 지나야 하고 견뎌야 한다.
나는 여전히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서툴고 미성숙한 엄마다. 두려움은 그 무엇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장맛비에 가려졌던 햇살이 다시 나온 것처럼 나도 두려움 앞으로 나와서 햇살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두려움을 걷어내고 나니 나도 보이고 아이도 보인다.
아이는 천천히 성장하고 이제 나는 여유가 있다.
우리는 겨우 사춘기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