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리스타 KM Nov 16. 2021

결혼해서 50년을 같이 산다는 것은

결혼 20주년과 결혼 50주년

한국 가는 것이 이렇게 가슴 떨리고 뭉클할 일이었던가.

2년 반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된 나와 아들은 비행기를 타고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영향력과 파괴력은 전 세계인의 삶을 눈에 띄게 달라지게 만들어 놓았다. 아직까지도 종식되지 않았기에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조건들이 있기는 하지만 각 나라가 단계적으로 교류의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하늘에도 다시 길이 열렸고, 나와 아들은 비행기 안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코로나가 가로막아서 무거웠던 마음의 거리만큼 싱가포르에서 한국 가는 비행시간이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6시간의 비행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나와 아들은 한국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한국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올해는 내가 결혼 한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결혼 10년 차에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올해는 특별히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결혼 20주년이면 리마인드 웨딩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만 특별한 시간은 갖고 싶었다. 그냥 나의 바람이었다고 해둘까 보다. 왠지 20년 동안 잘 살았다고 나 자신을 다독여주고 싶고 그런 마음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몇 달 전 아빠 엄마가 결혼한 지 50년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떡할까를 며칠 고민하다가 우리 가족은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평창에 다녀오기로 계획을 했다.

결혼 50주년 Golden wedding

예전 같았으면 형제들이 모두 모여 금혼식을 올려드렸을 텐데 지금은 가족도 여럿이 모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엄마 아빠만 모시고 한적한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엄마 아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렇듯 아빠가 먼저 나오셨다.

배낭을 짊어지고 나오시는데 웬 할아버지가 나오시는 게 아닌가.

80세. 할아버지 맞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 찡한지.

나에겐 항상 중년의 아빠 모습이었고 전형적인 할아버지로 기억된 적이 없었나 보다. 갑자기 너무 낯설었다. 3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가끔 영상통화를 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 모습은 영상과는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한 10여분 뒤 나오신 엄마는 나를 더 마음 짠하고 놀라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마른 모습. 가을 낙엽 마르듯 말랐다는 표현이 맞을까. 염색이 채 되지 않은 흰 파마 머리카락에 약간 굽은듯한 어깨는 내가 쉽게 봐왔던 노인의 모습이었다. 깡마른 엄마의 모습은 나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야속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였다. 코로나 때문에 그냥 흘러버린 그 시간들이 아까웠고, 부모님을 생각하면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했다.

평창 가는 자동차 안에서 우리는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나는 여러 번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나만의 생각에 빠져 몇 번씩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참았다.



여행을 다녀온 후, 친정집에 들어갔는데 아빠는 앨범 한 권을 우리에게 가지고 오셨다.

그 앨범에는 아빠 엄마가 결혼하기 전의 사진부터 결혼을 해서 우리 삼 남매를 낳고 키운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50년의 세월을 압축해서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어느 날 아빠는 두꺼운 새 앨범을 한 권 사오셔서 그동안 간직했던 여러 개의 앨범 속에서 사진을 한 장 한 장 선택하시고 새로운 앨범을 만드는 작업을 하신거였다. 그러고 나서 사진들마다 사진에 대한 날짜와 설명을 기록해 놓으셨다. 그것도 컴퓨터에서 신명조체로 프린트해서.

‘아빠의 자필이면 더 좋으련만….’ 나는 아빠의 필체가 그리웠지만 컴퓨터 글씨가 당신의 글씨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는지 언제부턴가 모든 글 작업은 컴퓨터로 하셨다.

아빠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옮기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까.

세월을 돌리고 싶기도 붙잡고 싶기도 하셨을 것 같고, 행복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결혼 20년 된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풋풋했던 아빠 엄마의 결혼사진.

앨범 첫 장은 엄마 아빠의 결혼식 사진이 있었다.

곱고 예쁘고 선남선녀의 모습이었다.

50년 동안 부부로 같이 산다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지 궁금했다.




내가 싱가포르로 가기 7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부모님을 때마다 업그레이드해드렸다. 트렌드에 맞는 변화로 음식이며 옷이며 여행이며 이런 것들을 같이 하곤 했었다. 두 분이서 매일 드시는 것만 드실 것 같아 새로운 음식점이 있거나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같이 먹으러 다녔고, 옷을 좋아하니 쇼핑도 코드가 잘 맞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아빠 덕에 이곳저곳 여행을 같이 다녔었다. 나는 살가운 자식이었고 부모님한테 제일 편한 자식이었다.

내가 싱가포르 가 있는 동안 친정 오빠나 동생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길 원했지만 서로 사는 것이 바빠서인지 그 자리를 대신 해주진 못했다. 부모님의 업그레이드는 7년 전에 머문 느낌이었다.

효도는 셀프였던가….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그 후로 두 분이 서로를 의지하는 것이 눈에 띄게 부쩍 늘었다. 어디를 가도 두 분이 같이 가고, 두 분이 운동도 같이 하시고, 별 거 아닌 이야기도 많이 나눈다. 그러다가 의견 충돌이 나서 많이 다투기도 한다. 부부싸움을 한 횟수가 50년이면 수없이 많다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는 것들이 있긴 한데 아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투다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나의 결혼 짬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분이서 배낭 메고 장 보러 가신다고 나서는 모습은 마치 나이 든 어린아이의 모습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

감히 20년은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서로의 존재와 삶의 깊이.



결혼 20년을 지나고 있는 나는 앞으로 30년의 세월에 어떤 사진들이 담길지 궁금해진다.

평범한 가정 안에 담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시간들을 우리가족이 어떻게 만들어나갈지도 궁금해진다.

그러나 나는 안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30년, 40년이 되어 있고, 그 어떠한 특별함도 인생의 긴 여정 속에서 하나의 부분으로 지나간다는 것을….

앨범 속 사진들의 나의 어린 시절은 부모님의 희로애락으로 일군 것이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부모님의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여 나의 삶을 비춰보고 미래를 상상해봤다는 것이 나의 결혼20주년의 어떠한 이벤트보다 괜찮았고 충분히 만족했다.

내게 의미있고 특별했던 결혼20주년~~

매거진의 이전글 힘이 되어준 최고의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