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새벽

by 사십대 소녀

고요한 새벽 거실로 걸어 나온다.


다른 가족들은 자고 있다.


해님이 반짝 뜨기 전,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좋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신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다.


미래는 아직도 불투명하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 채, 여전히 긴 터널 입구쯤 서성이며 조급해하고 있지만, 나의 마음 한쪽 구석은 굳건하고 단단하고 예전에 비해 평화롭다. 과거, 인생이 어떻게 흘러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꽈배기 마냥 꼬여가는 인생에 분개하며 우물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아우성 쳤다면, 우선은 지금은 그 우물 밖으로는 어찌어찌 빠져나와 서있는 듯하다.


회사를 다니던 주중에는 그렇게 아침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어도, 12시간 이상 숙면을 취했어도 대부분의 아침은 항상 힘들고, 울적했던 것 같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집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탄다. 좌석 버스 의자에 앉기만 하면 그렇게 졸음이 쏟아진다. 승객들은 대부분 회사원들이겠지, 모두들 고래를 뒤로 젖히고, 누가 그들의 모습을 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뿜으며 앉은 자리에서 가장 편안 자세를 취하며 조금이나마 더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나만 이렇게 사는게 아니야. 다들 이렇게 사는 구나. 이런 삶을 사는 건 당연하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그런 압박을 세상으로부터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간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휴가만 가면 이른 아침에 그렇게 눈이 반짝반짝 떠진다. 조식도 먹으러 가야 하고, 수영도 해야 하고, 일분일초가 아까워 기쁨의 행복의 안달이 난다. 술을 마셔도 밤 늦게 자도 전혀 피곤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에 아침이 아니 하루 내내 상쾌하다.


휴직 기간 동안 내가 해야 할 많은 일 중 하나는, 겹겹이 쌓여 있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을 정리정돈 하는 것이다.


시간은 회사 밖에서 더 빨리 흘러간다. 어떻게든 내게 주어진 시간을 회사 다닐 때 보다 더 유용하게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새벽 기상을 시작한 거였는데, 새벽 시간은 소소한 행복의 시간이다. 어두컴컴한 어둠 속 책상 앞 시간은 내게만 주어지는 비밀의 시간 같다. 이런저런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다 보면, 날이 서서히 밝아진다. 빛으로 밝아진 아침을 맞이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된다. 아이들을 깨우고, 밥을 먹이고, 유치원에 보내고. 집 정리를 하고 할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발맞춰 또 다시 오늘이란 이름으로 돌아온 오늘을 시작하고 함께 떠나보낸다.


나는 모두의 오늘이 오기 전, 그전까지의 어둠의 새벽 시간이 너무 좋다. 별거하지 않아도 행복한. 온전히 나와 교감할 수 있는 그런 나만의 소중한 시간이다.


새벽 기상을 하며 그 시간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기 시작한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중 이 시간만은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런데 몇 달 동안을 관찰해 본 결과, 이를 방해할 수 있는, 즉시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 막강한 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바로 술이다. ㅎㅎㅎ


술은 나와 떨어뜨릴 수 없는 나의 오랜 동지였다. 그 동지가 내게 실질적으로 필요했던 그런 건설적인 조언을 해주진 않았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켜 준건 맞다. 마시고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고. 밤새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서도 마시고. 그리고 그 다음날 그렇게 피곤하게 하루를 보내고도 6시 퇴근 시간이 되면 또 술집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나의 현실 도피 방법이었고, 말그대로 도피했다. 그래서 현실은 변화가 없었고, 깨달음은 있었으나 성장이 없었다. 모순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몰랐지만, 그런 것들이 내 얼굴에 다 써 있었겠지 아마. 나 회사 다니기 힘든데 억지로 다녀요 하고. 아마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녔을 거다. 남들은 모르겠지 했던 이런 나의 이런 고군분투를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 하지만 그 만큼 관심도 없기에 왜 저렇게 사나로 그냥 끝났겠지. 아님, 그냥 술 좋아하는 회사 직원 중 하나로.


그러한 시간들을 흘러 보내며, 인생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제발 머리 밖으로 나오자 결심하고 실행하려 앞 발을 내딛는 용기를 보인 시점부터 오랜 동지였던 술과의 이별을 고했다. 우리 같이 살지 말고, 이제 가끔씩만 만나자.


시간이 많지 않다는 조급함에 그렇게 즐기던 술자리 분위기는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않아졌다. 취기가 올라왔을 때의 살짝 달궈진 기분은 그 순간을 구름 위에 올려 놓는 듯한 마법을 부리지만, 그 다음날, 전날 마신 술로 조금이라도 피곤함을 느낄 때면, 새벽 기상의 루틴이 깨질 때면 항상 스멀거리며 나오는 죄책감과 울적함은 마음 깊숙이 박아 두었던 쓰적대기 없는 불필요한 감정들까지 모두 꺼내 끌고 나와 나를 하루 종일, 이틀을 심하면 몇일을 괴롭힌다.


비용이 너무 크다.


몇 일 전, 대학 때 친했던 친구들을 몇 년 만에 만났다. 어릴 적 친구들은 언제 봐도 너무 반갑고 편하고 어색함이 없다. 반가운 마음에 와인 몇 병을 들이켜며 즐거운 시간을 나눴고, 그에 대한 댓가로 다음날 너무 피곤해서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다. 내내 누워있었는데, 그 다음 다음날도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 인생을 힘겹게 틀에 끼워 맞춰 살려는 건 아닌가. 맨날 이렇게 열심히 사는 척만 하다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니. 내가 뭐라고. 얼마나 능력이 있다고. 얼마나 변할 수 있다고 그냥 정도 껏 살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지극히 평범해도 특별한 능력이 없어 향 후 이렇게 계속 평범하게 살 지라도, 세상이 귓가에 속삭이는 ‘다 그렇게 살아’ 늪에 빠지는 순간, 그런 생각이 나를 압도하는 순간, 나는 내가 나를 잃고 또 다시 오랫동안 허우적거리게 될 것을 안다.


사실.

세상이 유혹하는 게 아니다. 나 스스로 다시 그 늪으로 기어들어가는 거겠지.

..


버스를 타고 고개를 젖히고 잠을 잔다. 그러다가 내려야 할 목적지가 다가오면, 아 내리게 싫다. 그냥 이대로 눈을 붙이고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빙빙 돌며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움직인다.


아무튼 이렇게는 살지 말도록 하자.


술 마시지 말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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