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 감상 후기
대체로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편이다. 별생각 없이 영화관을 찾았다가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가 극장의 관람석인지 롤러코스터 좌석인지 모를 정도로 현란한 이야기를 '타는' 경험은 갑자기 큰 선물을 받는 일처럼 감격스럽다. 뻔하지 않은 전개, 감추어져 있다가 튀어나와 뒤통수를 갈겨줄 반전을 좋아하다 보니 역사적 사건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향한 애정이 덜하다. 결말을 알고 보는 격이라서다. 역사적 사실 사이의 작은 틈에 많은 상상력을 욱여넣는다 해도 큰 틀은 대체로 팩트에 기반하고 있어 이야기가 갖는 긴장이 확실히 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토요일에 <올빼미>를 보았다. 유해진과 류준열, 두 배우에 대한 믿음과 기대 때문이었다. '인조와 소현세자에 관한 이야기이고 유해진이 인조 역할을 맡았다'까지가 내가 가진 정보의 전부였다. 유해진이 인조라 하니 류준열은 소현세자인가?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화면에 류준열이 등장하고 '소현세자가 아닌데?' 하다가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그래서 제목이 올빼미구나'하는 깨달음이 있다가 이내 하염없는 슬픔에 눈물을 쏟았다. 두 배우에 대한 믿음과 기대도 충분하리만치 보상받았다. 영화를 안 본 사람들에게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기까지만 읽고 영화를 보시라. (그리고 영화를 보고 다시 오시라.)
-아래에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인공 경수(류준열)는 주맹증을 가진 침술사다. (주맹증이라는 단어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밝은 데서는 볼 수 없지만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있다는 설정은 이 영화의 제목이 '올빼미'인 이유다. 경수가 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침술에 있어서만은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앞을 볼 수 없다는 '무능력' 때문이었음은 영화 후반에 드러난다. 그는 어둠 속에서는 앞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만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경계심 없이 들러리 세운 그 자리에서 그는 비밀을 목격한 자, 진실과 마주한 자가 된다.
이 영화는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실감 난다. '본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더한 능력이다. 아니 능력보다는 권력에 가깝다. 엄연히 신분제가 존재하는 시대라, 비천한 자가 자신이 본 것을 본 대로 고할 수 없는 것이 쉽게 납득된다. 목격자로서 말하는 것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권한 내지는 허용의 문제다. 내가 말해도 되나. 말해도 내가 안전한가 하는 문제. 왕이 설계한 악행을 똑똑히 보아버린 자로서 경수는 진실을 밝힐 것인가. 조선의 왕을 상대로 내부고발을(도대체 어디에다가?)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다. 우리 시대의 내부고발자 역시 양심만으로 움직였다가는 권한과 허용의 거미줄을 피할 수 없다. 폭로를 한 자가 작은 흠이라도 잡히는 날에는 도리어 큰 역풍을 맞는다.
힘없는 '경수'가 진실을 밝히려고 할 때, 나는 그를 힘껏 응원했다. 목숨을 건 그의 행동이 무모해 보이지 않는 것은 탄탄하게 구축해놓은 서사 덕분이다. 소현세자가 끔찍하게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한 경수와 관객은 같은 마음이 된다. 그 장면 직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데,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며 죽어가는 자의 슬프고도 서러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일 거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사람을 살리는 행위를 빙자해 죽이는 일에 열심인 괴이한 자와 그것을 보고도 본 척할 수 없는 비천한 자도 함께 있었다.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엉키는 장면이라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먹먹하다.
소현세자는 죽었다. 인조는 이후로도 건재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서스펜스를 방해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배우들이, 이야기가 나를 숨 막히게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이야기를 탔다. 그러나 현란한 이야기 속에서도 자주 '만약에'를 생각했다. 결국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어서 서글픈 것이지만, 출중한 역사 인물이 비명횡사한 것을 두고 '만약에'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만약에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를 이어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전혀 다른 조선 역사가 펼쳐지진 않았을까. <나비효과> 같은 영화만 보더라도 작은 선택 하나가 큰 변화를 초래하지 않던가. 훗날 19세기의 어느 적절한 시점에 슬기로운 개항을 하고 외세에 끌려다니지 않고 근대화를 잘 이루어냈을까. 그리하여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은 끝내 이정재를 살해하는 임무를 완수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감독이 관객에게 선사하는 작은 위로일 것이다. <올빼미>의 감독도 관객을 위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었지만, 끝내 씁쓸함이 남는 것 또한 관객의.몫이다. 경수가 목숨을 걸고 행한 내부고발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린 서인이 오래 권력을 쥐었다는 게 팩트이고 영화를 보면서 했던 '만약에'로 시작하는 나의 상상 또한 헛수고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극장 문을 나서면 서글픈 상상일랑 접고 현실을 향해 눈을 부릅떠야 할 것이다. 제대로 보는 시민의 눈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리니. 어둠 속에서 더 잘 보는 한 마리 올빼미처럼. (2022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