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때까지 잠시만 안녕
박은빈을 처음 눈여겨보게 된 건 SBS 드라마 <스토브 리그>에서였다. 목소리가 맑아 귀가 먼저 알아봤다. 연기력으로 극찬을 받아낸 남궁민에게 밀리지 않고 반짝반짝 빛을 내던 신인 배우로 기억해두었다. 이미 종영한 드라마를 뒤늦게 며칠 만에 단숨에 몰아서 보고는 그 덕에 야구를 즐겨보게 되었... 던 것은 아니고, 박은빈이 입고 나온 모직 재킷을 따라서 샀다. 그 후로도 그 옷을 입을 때마다 종종 박은빈을 생각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에서도, <마녀 2>에서도 (영화 전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박은빈은, 연기를 포함해서 다 좋았다. 맑은 목소리에 또랑또랑한 발음, 반짝이는 눈망울,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고운 결은 분명한 그의 매력이다. 박은빈이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우영우는 상상할 수 없었다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제작사의 언급이 홍보성 멘트가 아닌 진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친구의 추천으로 3회가 방송되던 날에야 1회를 보기 시작했는데 나같이 일평생 드라마를 봐온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것이다. 1회를 보고 나면 '어머, 이건 봐야 해'라는 확신이 든다. 법정 드라마를 많이도 보았지만 통쾌하고 정의롭기만 한 게 아니라 이렇게 따뜻한 법정 드라마가 있었던가 더듬어보게 될 만큼 따뜻하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이야기와 연출은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 물론 우영우가 가진 캐릭터의 힘이자 실사로 잘 구현한 박은빈의 덕이다.
특히 2회- 흘러내린 웨딩드레스 편에 흠뻑 반하게 되었는데 뻔하지 않은 전개임에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이음새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도,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면서 이렇게 구리지 않은 전개가 가능하다는 것이, 권모술수에 휘말려 우영우가 위험해질까 움찔했다가는 위험 근처에도 가지 않는 전개에 안심하는 시청 경험이 새롭다(시청자와 유치한 밀당 따위는 안 하겠다는 패기?). 요즘 드라마답게 로맨스 서사는 굳이 없어도 되지 않나 생각했던 게 미안해지는 고양이와 집사의 비유는 또 어떤가. 지난 두 달간 우영우야말로 나에게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었다.
"길 잃은 외뿔 고래가 흰고래 무리에 속해 함께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외뿔 고래와 같습니다. 낯선 바다에서 낯선 흰고래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모두가 저와 다르니까 저를 싫어하는 고래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삶이니까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
어제 마지막 회를 보았다. 개학 직후라 심신이 매우 지쳐있던 참이었다. 20년을 넘게 일했으면서도 개학 때마다 이렇게 힘들까, 앞날에 대한 부담감에 개학 전날에는 잠도 설쳤다. 이러는 내가 한심해지기 시작하면 방학 내내 태평양이었던 마음이 작아질 준비를 하고 부정적인 생각만 피어올랐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다방면으로 염려하느라 그랬던 것도 같다. 다수의 아이들과 1년이라는 장기적 관계를 맺는 일이 나같이 에너지가 적은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벅찬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아내면서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괜히 과거를 후회하기도 하고 다른 선택은 없을까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용을 써가며 고스란히 건강을 갉아먹히는 기분을 느꼈다. 사실은 완벽에 얼씬도 못하는 주제에 완벽하고 싶어 하는 이의 과도한 책임감 탓인지도 몰랐다.
이런 심란함 속에서 영우가 말한 저 문장이 나를 깨웠다. 감히 극중 영우가 겪어내야 할 삶의 무게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내게 주어진 작은 짐에 몸부림치고 부정하고 외면하고 있는 어리석은 내가 작은 점이 되어 내려다보였다. 수용하는 태도로 살아야겠다고 입만 살아서 떠들었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잘 지내다가도 한순간 삐끗하면 낮은 곳으로 미끄러져 허우적대는 정서적 허약자인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늘 기분 좋고 평정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사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글러먹었다.) 일희일비하는 나 자신을 향해 제발 좀 작작하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그래, 외줄을 타듯 살살, 소를 몰듯 천천히 그렇게 가는, 그래 이게 나의 삶이다. 이런 삶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세상에 딱 하나뿐이라 가치 있고 아름다운 '나의' 삶인 것이다. (2022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