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오해한 내가 죄인
감히 사십 대 중반의 내가 해도 되는 얘긴지 모르겠지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몰랐던 나, 만난 적 없던 새로운 나를 발견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내가 아직도 자라고 있단 증거라도 되는 양 반갑다.
뜀틀을 못 넘어 쩔쩔매고 체육시간마다 쭈글이였던 내가, 언제부턴가 중량을 늘려가며 데드리프트를 하고 스우파에 빠져 헤이 마마 댄스를 연습한다. 내가 몸을 쓰다니!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내가 이럴 줄 몰랐다' 시리즈에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술에 관한 것이다. 과거의 나에게 술은 일종의 비용 같은 것이었다. 필요해서 갖는 직장 회식이든 좋아서 갖는 지인들과의 술자리이든 간에 술은 맛이 없지만 참고 먹어야 하는 것, 목적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 더 참고 많이 먹을 것인가 덜 참고 덜 먹을 것인가 하는 선택만 있을 뿐 예의상, 분위기상 먹는 것이지 치킨이나 떡볶이처럼 더 먹고 싶은데 참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엔 가만히 있다가도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탁 하고 술 생각이 켜진다. 지난 금요일의 저녁 메뉴는 광참회였다. 광어와 참돔을 정답게 정렬하여 먹음직스럽게 담아낸 한 접시를 남편이 퇴근길에 포장해왔다. 요 며칠 아침은 가볍게, 점심은 맛있게, 저녁은 생략하며 몇백 그램씩 차근차근 감량해나가고 있었는데, 성공적으로 우하향하던 체중 그래프에 제동을 거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저 술이 당겼기 때문이다. 회를 가운데 두고 나는 소맥을, 남편은 소주를 마셨다.
쓰고 독해서 싫은 소주와 싱겁고 배불러서 안 내키는 맥주를 간 맞게 잘 말아낸 소맥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2년 전부터다. 실로 늦은 만남이다. 사실 맛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 신입생 때 주는 술을 다 받아마시다가 끝내 변신해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놀란 눈으로 목격하면서, 두어 번쯤 필름이 끊겨 아찔했던 일을 몸소 겪으면서 술과 불화하였고 이후 이십여 년간 화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다른 식품들과 차별되는 술의 본질은 마시면 취한다는 것일진대, 바보 같은 소리 같겠지만 이걸 너무 늦게 알았다. 취하는 것을 술의 부작용쯤으로 여기고 기를 쓰고 안 취하려 힘싸움을 해왔달까. 자기 통제 욕구가 유난했던 탓이라고는 하지만 엉뚱한 상대와 멍청한 줄다리기를 해왔던 격이다.
마시면 취하는 것, 취하려고 마시는 것. 술은 착실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혐의 없는 술을 향해 오랜 시간 눈을 흘겨왔다니. 소맥의 맛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라 알딸딸한 딱 좋은 상태의 취기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된 후에야, 바꾸어 말하면 술의 본질을 똑바로 보고 수용하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술을 즐길 수 있게 된 셈이다.
부처님은 삶이 곧 괴로움임을 진작에 간파하였다. 행복이 인생의 기본값이 아니라 행운에 가깝다는 사실은 괴로운 일은 덤덤하게, 좋은 일은 더 감사하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본질)을 제대로 볼 줄 알게 되면 한정된 에너지를 적재적소에 잘 배분해가며 지혜롭게 살 수 있을 텐데, 나는 갈 길이 멀다.
마침 책장 구석에서 발견한 <한자 암기 박사>라는 책에는 취할 취(醉)를 이렇게 풀이해 두었다. 술(酉)의 졸병(卒)이 되다. 한자 형성의 원리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쨌거나 지나친 음주는 금물이고 졸병이 될지 말지는 마시는 자의 몫. 술은 죄가 없다. (2022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