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웃긴 의사들 1

정형외과

by 박기복

무더운 날씨 탓인지 기력이 쇠퇴한 탓인지 부쩍 잠이 늘었다. 실은 일찍 일어나려는 의지도 없다. 개학하면 아침형 인간으로 돌아갈 거고 일단 지금은 좀 자야겠다는 마음. 여하튼, 오늘도 깼다가 다시 잠드는 과정을 몇 번 거친 끝에 11시가 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는 동안 왼손으로 머리를 한참 떠받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왼쪽 손등에 뻘겋게 자국이 나있었고 왼손이 저릿저릿 얼얼했다.


소파 위에 흩뿌려진 빨래들이 보였다. 비몽사몽 빨래를 개고 주섬주섬 식사를 챙겨 먹었다. 그러다 문득 손을 만졌는데 여전히 왼손의 저림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뭐지? 손을 주물러도 보고, 따뜻한 물로 찜질도 해보고 심지어 사혈침으로 손끝을 따보기까지 했으나 여전히 엄지와 검지 사이가 저릿했다. 걱정스러웠지만 얼마간 기다려보기로 하고 개학 준비차 노트북을 열고 이런저런 일처리를 했다.


오후 5시가 넘어서도 저림은 남아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현상 앞에서 걱정은 뭉게뭉게 커졌다. 내일은 광복절이고 곧 개학이다. 만약 증세가 심해지거나 통증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가까운 정형외과를 찾았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다. 새로 지어 올린 건물에 차린 새 병원답게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대기실에는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접수를 하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꽤 길었다. 병원이라는 곳은 사람을 참 작아지게 하지 않던가. 게다가 아직 증상의 원인도 모르는 상태이니 적잖이 불안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목디스크일 수도 있다고 하고 특정 근육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의사는 무슨 말을 하려나. 차라리 정형외과에서 해결되는 문제면 다행인데 혈관의 문제라거나 뇌신경과 관련된 문제면 어쩌지? 불안은 점점 커졌다.


한 시간을 대기한 끝에 진료실에 들어갔다. 마스크를 써서 나이가 짐작이 잘 되지 않는 의사 앞에서 걱정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자는 동안 눌린 것 같은데 이렇게 오래 저림 증상이 있는 게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왔다고.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의학적으로 표현하자면..."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 이게 병명이 있구나. 의학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려나 보다... 하고.


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감각 신경의 졸도에요. 일시적 졸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순간 나는 숨을 참았다. 웃음이 터질 뻔했기 때문이다. 의학적인 설명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건 국어시간에 익히 배운 의인법이 아니던가? 의인법을 활용한 문학적 표현, 신경의 졸도라. 나는 아직 다행히도 졸도한 적은 없는데 왼쪽 손의 감각 신경이 졸도를 해버려 이거 참 난감하구먼. 머리로 짓눌러 신경을 졸도시켜 버리다니 이런 일이... 세상에나.


별 일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고, 3일 후에도 여전히 증상이 남아있으면 다시 오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왔다. 자는 동안 손등의 감각 신경을 졸도시켜 버린 환자의 뒷모습을 보고 의사도 웃음을 참았으려나. 그나마 졸도라서 다행이다. 오늘의 병원 방문은 웃참 챌린지로 마무리되었지만 아직은 두고 볼 일. 왼손의 신경이 어서 의식을 회복하길 바라며 오늘밤엔 왼손을 고이 오른손 위에 포개 올리고 자야지.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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