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수 방류, 도박판으로의 초대
어렸을 때부터 순대를 좋아하긴 했다. 윤기가 자르르한 순대가 똬리를 튼 채, 이슬 맺힌 비닐 이불을 덮고 있을 때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잘 벼려진 칼이 순대를 슥슥 자르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시선집중. 순대용 소금은 또 얼마나 적절한가. 쫄깃한 식감, 짭짤한 소금맛, 친근한 돼지향. 간혹 유난히 찰진 순대를 만나면 뚝딱 한 접시를 먹어치울 수 있었고 떡볶이와 함께 먹다가 남길 망정 그래도 순대를 외면하지는 못하였다.
서른쯤에는 순대 한 접시보다 순댓국을 즐겨 먹는 어른이 되었다. 어느 부위인지 짐작이 될 듯 말 듯한 갖가지 돼지 부속들 탓에 진입장벽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젠 돼지 부속을 먹는 맛으로 순댓국을 찾는다. 고기를 우린 깊고 담백한 맛에 양념장을 가미하면 얼큰함도 느낄 수 있을뿐더러 들깨가루를 잔뜩 뿌려주면 고소하기까지 하다. 마늘, 고추를 필두로 해서 갖은양념이 들어간 국물의 깊은 맛에는 분명 사람을 위로하는 뭔가가 있다. 맵기 때문인지 뜨끈한 온도 때문인지 그 강렬한 위로를 잊지 못하겠다.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어가면서 조심스레 한 숟가락 떠먹으면 국물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바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심장을 쿵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마저 든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뚝배기 바닥까지 국물을 긁어먹고는 냅킨으로 이마와 콧잔등의 땀을 닦고 입가에 묻은 양념을 싹 닦아내면 이미 낡고 자잘한 감정은 정화된 후다.
개학 2주 차인 이번 주는 닷새가 맞나 싶을만치 길었다. 어제부터 순댓국 생각이 났다. 과연 나의 소울푸드답다. 퇴근 후 남편과 함께 단골 맛집을 찾아갔다. 순댓국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오늘의 소주는 오롯이 내 몫. 순댓국을 받자마자 건더기부터 건져서 밥그릇 뚜껑 위에 두었다. 열기가 빠져나간 순대와 각종 부속들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첫 잔은 남편이 따라 주었고 그다음부터는 혼자서 따라 마셨다. 4잔을 마시니 반 병이 남았다. 나른한 취기가 올라왔다.
차 타고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서점 구경이 하고 싶어졌다. 서점 앞에 내려 달라고 하고는 혼자 천천히 책들을 구경했다. 음주 후 책 고르기는 난생처음.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아 대낮 같은 저녁 시간에 사람들은 내가 음주상태인지 전혀 모르겠지 큭큭. 사소하고 무해한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즐거웠다. 취기 탓일 게다.
책 한 권을 사서 근처 카페로 갔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밀크 푸딩을 주문했다. 아직 남은 소주의 쓴 맛을 푸딩으로 정리하고 시원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금세 취기가 사라졌다. 만족스러웠다. 순댓국과 소주, 푸딩과 커피까지. 아, 음식이 주는 기쁨은 얼마나 큰가!
집에 돌아와 신문을 펼쳤다. 일, 오염수 '30년 도박' 시작이 1면 기사제목이다. 원하지 않는 도박판에 딸려 들어간 처지라 생각하니 서글프고 화가 난다. 이제 무엇을 먹어야 안심이 될까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내 사랑 순댓국인들 안전하랴. 주재료는 돼지고기이지만 육수를 우리는 단계에서부터 단 하나의 해물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 일단 소금부터가 결백하지 않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위험 앞에 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일본도 일본이지만 우리 정부의 결정도 이해하기 어렵다. 중요한 결정을 위임하려고 다수의 사람들이 뽑아놓은 자들인데 다수의 이익을 좀처럼 고려하지 않는다. 유권자인 우리들에겐 다른 권리(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 같은?)는 없고 오로지 투표권만 있는 건가. 제대로 설득하고 납득시키려고도 하지 않은 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들을 내려버렸다. 불안과 걱정은 이제 펄떡이며 내 품 안에 살아있다.
혹시나 물이 오염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며 사는 삶이란 어떤 형태일까. 세상 그 무엇이 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질병이 찾아오면 일단 오염수부터 의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의심한다 한들 연관성을 입증할 수는 있을까. 오염수 처리를 위해 치러야 할 경제적 비용도 엄청나다는데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비용으로 환산하면 그건 또 얼마나 될까. 어떤 이들은 '음식'을 잃고 또 다른 이들은 '생업'을, '삶'을 잃을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린 자들은 무엇을 얻게 될까? (2023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