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인 데다가 역사를 가르칩니다
주말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가만히 멍 때리다가 눈곱만 떼고는 밖으로 나왔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한 여름에도 아침 6시 언저리의 바람은 제법 서늘했던 게 생각나서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가을이 오고 있긴 하구나. 반가운 마음이 든다.
가볍게 읽을 책을 챙겨 나왔는데 펼칠 생각도 않고 벤치에 앉아 또 가만히 멍을 때린다. 음악을 듣고 싶은데 에어팟이 없다 싶은 순간, 이미 들을 거리가 풍성함을 알아차린다. 풀 벌레 소리, 새소리가 쉼이 없다. 이른 아침의 소리란 이런 것이군 새삼 새롭다.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보니 개미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발등에 올라탄 개미 한 마리를 발견하고 놀라 털어냈다. 기분 탓인지 자꾸 발이 간지럽다. 연신 발을 털며 호들갑을 떨다가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과 눈이 마주쳐 머쓱해진다.
털이 고운 큰 개를 데리고 나온 여자는 몇 걸음 걷더니 가만히 선다. 반려견은 풀에 코를 박고 한껏 냄새를 맡는다. 개들이 밖에서 해야 하는 중한 일이 냄새를 맡는 거라는데. 뒷모습마저 신나 보인다. 문득, 이제 보니 나도, 나야말로 냄새를 맡으려고 산책을 나왔구나 싶다. 바람 냄새를 맡으려고 자꾸만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이 개들과 다르지 않구나. 이 아침에 여기 앉아서 나뭇잎 냄새, 바람 냄새를 맡는다.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냄새 안에 열기라곤 없이 그저 선선하다. 바람의 냄새, 나뭇잎을 비추는 햇살의 세기,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 예민하게 감각을 깨워 이런 것들을 느끼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살아있구나.'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한창 글을 써대던 2주 전에 여기까지 썼다. 분량이나 주제면에서 완성된 글은 아니었다. 뭔가를 더 보태서 글을 발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불현듯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런 한가한 소리나 쓰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토요일마다 교사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집회 현장을 찍어 올린 사진이 단톡방에 올라올 때면 죄책감을 느꼈다. 집회에는 고작 한 번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침 그날은 비가 오락가락해서 더위로 인한 고통도 없었다. 차라리 땡볕이었으면 부채감이 덜 했을까.
단지 이번은 저 사람 차례일 뿐 다음엔 당장 내 차례가 될 수 있는 문제였다. 교사의 특정 행동과 아동학대로 신고를 당하는 일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을지언정 명확한 인과관계는 없는 것 같다. 문제를 삼아야 문제가 되는 법이니까. 행동이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 소위 '진상'이라고 표현되는 학부모를 만났다는 자체로 문제 교사가 될 확률은 (아주) 높아진다. 공포스럽고 불안했지만, 또 당장은 무탈한 일상 앞에서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고 주말에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실은, 사지에 내몰린 듯한 위기감과 부채감, 죄책감 같은 것들을 견디느라 조금 힘들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찍 눈뜨기가 어려웠고 마음의 허기를 엉뚱하게 먹는 걸로 채우는 일도 잦아졌다. 상황은 점점 가관이어서 언제부턴가 홍범도 장군이 신문에 오르내렸다. 교과서에 버젓이 나오고 그 활약을 당연히 가르쳤던 독립운동의 영웅이 일순간 반국가세력으로 취급당하는 현실을 목도하는 일은 참담한 경험이었다.
나는 하찮고 비루한데 내가 속한 거대한 구조가 이미 너무 엉망이어서 어디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망스러웠다. 근데 또 가만 생각해 보면 인류가 등장한 이래 이 세상은 늘 문제투성이 아니었던가. 권력을 둘러싼 피비린내들, 약자들에 대한 착취, 거짓과 위선, 불공정, 불평등 같은 것들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맞서는 자들, 변화를 염원하는 자들에 의해 자유와 권리를 조금씩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세상은 바뀌어 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교사들의 극단 선택에 대한 기사가 반복되더니 벌써 5명째다. 웅크려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절망스러울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게중심을 앞으로 밀어내 한 발짝 앞으로 가보자고 분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끝내 역사를 이끌어 왔다.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비루하고 비천한 한 명 한 명이 마중물, 불쏘시개, 땔감으로나마 고귀하게 쌓아 올려져 여기까지 왔다. 역사가 말해준다. 인간에게 희망마저 남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낙담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분투의 일환. 일단은 삽시다. 살아냅시다.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