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립겠지요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교무실 책상에 엎드려있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뿔싸. 내 자리에서 나는 소리다. 노트북에서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교무실 안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매우 당황스러운 마음이 된다. 빨리 음악을 끄려고 마우스를 움직여 음소거 버튼을 찾는다.
어? 버튼이 어디 갔지? 늘 있었던 그 자리에 음소거 버튼이 없다. 아! 이제 보니 노트북이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나는 소리잖아? 스마트폰을 조작해 음악을 끄…려고 하는데 젠장 꺼지질 않는다. 뭐지? 이거 어떻게 끄지? 나는 여전히 당혹스럽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음악은 계속 흘러나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음악을 끌 수 없다. 주변 사람들까지 가세해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는다.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난다.
거실 소파에서 누워 자고 있던 참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휴대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교무실에서 울려 퍼지던 바로 그 노래다. 풋. 어이가 없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잠이 깊이 들었다고? 음악 소리가 이렇게 크게 나는데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환경에 맞춤하여 꿈을 꾸고 있었다니. 이건 흡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 같은데?
어제 아침의 일이다. 꿈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고 아낀다. 아침부터 꿈 이야기를 하면 재수가 없더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실제임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대신 호기롭게 남편을 향해 외친다. “아직 우리에겐 쉴 날이 3일이나 남아 있어!!!”
황금연휴다. 황금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적절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반짝반짝 귀한 6일짜리 연휴. 사정상 친정 방문이 연기되고 오래전 잡아둔 약속마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무산되는 바람에 가뜩이나 긴 연휴가 확 한가해져 버렸다. 굳이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여유를 즐겨보기로 했다. 미뤄둔 읽고 쓰기를 좀 해보자는 욕심도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듯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어서 어제 종일 빈둥거렸다. 아주 조금 독서를 했지만 말 그대로 아주 조금이었고 대체로는 소파에 누워서 폰을 만지작거리고 넷플릭스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추석 대목을 맞아 즐길거리는 어찌나 많던지. 그러면서 얻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또렷한 통찰이었다. 아, 나는 노는 게 제일 좋아.
일하지 않고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절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 1~2년이 그랬다. 내가 정말로 되고 싶었던 것은 한량이었다며, 일하기 싫은 마음에 끊임없이 장작을 대주던 시기. 물려줄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들이 사는 패턴으로 살 필요가 있을까,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이렇게 괴롭게 살다가 갑자기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생각들이 꺼지지 않고 장작을 지폈다. 나의 우상은 파이어족이었고 퇴사라는 단어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용기보다는 불안인지라, 마음만 굴뚝이었다. 퇴사 후의 플랜도, 경제적 자유를 누릴 시나리오도 없었다. 양육을 맡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연금이 나오는 65세까지 남편에게 의지해 놀고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일하기 싫은 마음은, 잠재우는 수밖에.
여름이 끝나가나 기대감이 들 무렵, 선선한 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던 무렵. 아침 출근길 우연히 라디오헤드의 ‘creep’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순식간에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스무 살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웠다. 그 시절의 내가, 나의 젊음이, 내가 가진 가능성이, 당시의 내가 곧 만나게 될 인물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뭉클해졌다. 평소 좋아하는 타임 슬립 장르의 주인공처럼 과거에 잠시 다녀오기라도 한 기분이랄까. 그때는 그게 좋은 줄도 모르고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서 보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귀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든 거다.
지겨워 지겨워하면서도 꾸역꾸역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 이 시절도 그렇지 않을까. 일하고 싶다고 애원해도 더 이상 직장에 머물 수 없는 나이가 되고 나면 애틋하게 그리워지지 않을까. 아침마다 나갈 곳이 있어서, 내가 할 일이 있어서, 밥벌이를 할 수 있어서 그때가 좋았더라고, 그때는 그게 좋은 줄도 모르고 싫다 싫다 하면서 아우성을 쳤었지만 지지고 볶는 그게 인생의 맛이었다고 혼잣말을 하게 되진 않을까.
몇 주 전 출근길에 스며든 이 작은 생각 하나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자꾸 되새기고 곱씹다 보니, 일하기 싫어지는 마음이 올라올 때 단번에 꺼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그리움 덕이었다. 미래에 다녀온 시간 여행자처럼 이미 그 그리움을 경험한 기분이 들었고 신기하게도 일에 대해 조금은 애틋해졌다.
역시 '감정'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글을 쓰자고 스스로 아무리 다짐하고 격려한들 생각만으로 책상 앞에 앉아지질 않았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고 미래를 엿보고 오는,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취해 오랜만에 글을 쓴다. 황금연휴에 취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찬란한 휴일은 아직 이틀이나 남았고, 나는 뽀로로와 친구들처럼 노는 게 젤 좋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길까. (2023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