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 우드 전시회를 다녀와서
오랜만에 미술 전시회에 다녀왔다. 딱히 큰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마침 장소가 광화문 근처 일민미술관이었고(나는 광화문 일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신문에 실린 몇 줄의 설명(주목받는 런던의 신예 작가, 첫 개인전)과 곁들여진 몇 작품에 조금 흥미가 생겼다. 전시 마감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니 괜히 조급해졌을 수도 있다. 홈쇼핑 방송의 '마감임박' 멘트는 얼마나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가.
이시 우드(ISSY WOOD)라는 젊은 작가의 전시회였다. 평일 저녁인데도 관람객이 꽤 있었다. 전시 제목은 'I like to watch.' 1층부터 3층에 걸쳐 여러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3층 한쪽에서는 영상도 재생되고 있었다. 전시장 입구에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긴 글이 있었는데, 읽는 족족 난해했다. 읽기를 포기했다. 그래, 예술은 쉽지 않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독특했다. 잘못 찍은 사진 같달까. 초점은 살짝 어긋났고 실수로 과하게 클로즈업이 된 것처럼 구도는 엉뚱했다.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그렸는데 티셔츠 가슴팍만 그려놓은 식. 제목은 또 어찌나 재기 발랄한지. 작품을 보고 제목을 읽으면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묘하게 어울렸다. 전반적으로 이해가 쉽지는 않았지만 명백하게 흥미로웠다.
2층 전시장 벽엔 몇 페이지에 걸친 그의 글도 새겨져 있었다. 3층에 올라가니 옷들이 옷걸이에 걸린 채 매달려 있었다. 높은 곳에 매달린 옷들에 그려진 그림들을 한참 바라봤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입구 반대편 어두운 방에서는 영상과 음악이 흘러나왔다. 의미 이해와 별개로 충분히 시선을 붙잡아 끄는 영상들이었다. 뒤에 서서 한참 영상을 봤다. 자기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한 예술가로구나. '평범'의 범주안으로는 절대 끌어들일 수 없을 만한 비범한 사람. 부러웠다.
전시를 보고 나오며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그림에, 글에, 영상에... 종합예술인이네.
남편이 답했다.
-그러네. 홍서범이네.
종합예술인이라는 단어를 뱉으면서 나 역시 홍서범을 잠깐 떠올렸던 터라(세뇌가 이렇게 무섭다.) 더 웃겼다. 난해한 전시는 맥락 없이 홍서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관람을 모두 마쳤지만 잘 모르겠다. 모호한 느낌만 남았을 뿐.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었다면 좋았겠지만 뭐 괜찮다. 내가 미술 전시회에 가끔 가는 이유는 뭔가를 알거나 배우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평소에는 맛보기 어려운 낯선 자극을 받고 싶은 작은 욕심 때문이랄까. 안 쓰던 근육을 단련하는 운동을 하거나 안 먹어본 음식을 먹어보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남는 것은 작가의 이름과 어렴풋한 느낌 정도.
얻는 것이 더 있긴 했다. 물론 아주 일시적이지만 잠시 세상만물이 달라 보이는 경험. 한 시간 정도 전시장 안에서 작품 하나하나를 골똘히 감상하며 저건 무슨 의미일까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그 관성 탓인지 그저 심상하게 두고 보던 주변이 달라 보였다. 무심한 계단은 반듯한 직선이 교차하고 반복되는 오브제처럼, 한쪽 구석의 화분은 대단한 의미를 담고 놓인 예술품처럼, 비상구를 알리는 간판은 초록과 흰색의 대비가 강렬한 '작품'처럼도 보이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갈아 끼운 것처럼 주변을 더 적극적으로 보게 되는 신기한 경험.
나에겐 일시적 현상으로 지나갔을 뿐이지만, 일상적으로 남들보다 더 세심하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 남들이 흘려보는 것을 눈에 깊이 담는 이들이 문학, 미술, 음악 분야 생산자가 되는 게 아닐까. 예술이라는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활동은 결국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될 테니까.
내 눈에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존재들이라서 예술 창작자들을 좋아하고 동경한다. 예술 분야의 소비자에 머물고 마는 나는, 그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를 부지런히 읽고 보고 듣는다. 소비자로서 돈과 노력을 들여 나를 일깨울 자극을 산다. 때때로 몸서리치고 종종 못 알아듣지만 소비를 멈추지 않는다. 언젠가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I like to watch, too. (202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