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구원에 이르는 말
오래전에 같은 교무실에서 근무했던 A는 조금 밉상이었다. 물론 내 기준.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는 스타일이라 귀에 거슬릴 때가 많았고, 한 입을 갖고서도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는 걸 인지한 후로는 마음까지 거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게 특별히 직접적 피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라서 A의 존재는 아주 사소한 불편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A를 볼 일이 잦아졌다. 심지어 퇴근 후 사적인 만남을 종종 갖기까지 하였는데 그건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해 좋아하게 된 B와 A가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음에 드는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불편한 사람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지금 같으면 어떻게든 피하겠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불편한 마음을 견디는 일이 마음에 드는 친구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곁에서 보니 A에게는 장점도 많았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 챙겼고 야무진 자기 관리는 배울만한 대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발달해 버린 촉각이 무뎌지지는 않아서 A가 특정 상황에서 지극히 이기적인 말들을 쏟아낼 때면 어색한 공감을 표하느라 종종 난감해졌다. 가깝게 지내고는 있지만 순도 100프로의 진심이 아닌 관계는 은근한 피로감을 줬다.
어느 날, 또 다른 동료인 C에게 작정하고 A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솔직히 나는 험담을 하고 싶었다. 욕심 많고 이기적인 A를 성토하고 싶었다. 마음이 통하고 믿을만한 C가 내가 느끼는 이 불편함에 동조해 주기를 바랐다. 아직 몇 마디를 하지도 않았는데 웃는 얼굴을 한 C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 A가 좀 귀여운 구석이 있지.
C는 분명 내가 어떤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A의 어떤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굳이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해 뒷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대뜸 직접적으로 험담을 꺼내기 조심스러웠을 수도 있지만 '귀여운'이라는 표현 앞에서 애초에 가졌던 나의 의도가 부끄러워졌고 C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던 터라 말을 돌렸다.
꽤나 오래전이고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대화였는데도 이 일은 장기 기억으로 남았다. 아마도 그날 내가 한 가지를 확실히 배웠기 때문이리라. '귀여운'이라는 단어의 엄청난 활용. '나는 너의 단점을 알아. 충분히 못마땅하지만 타고난 천성을 숨기지 못하는 너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 으이그'를 축약해 놓은. 그 너그러움 내지는 여유에 반해 이미 좋은 사람으로 분류해 두었던 C를 더 좋아하게 됐다. 나도 얄미운 사람을 한 번 귀여워해 볼까 하는 마음을 낼 수 있었던 덕분에 A를 대하기도 훨씬 편해졌다.
이런 생각을 품고 사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나이가 가져온 변화일까. 부쩍 자주, 전 같으면 얄밉게만 보일 사람이 종종 귀엽게 보인다. 욕망이 뚜렷하게 보이는 사람, 유리처럼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사람도 귀엽고, 불평불만을 자주 하면서도 자기 자랑은 꼭 하고 넘어가는 사람도 은근히 귀엽다. (비아냥거리는 것도 돌려 까는 것도 아니다.) 남편이 자주 귀여운 것도 남편의 단점을 너무도 명확히 알기 때문일 거다. 속을 훤히 알겠어서 저 사람이 지금 차마 말로 뱉지 않지만 품고 있는 욕심이 무엇인지 들여다 보일 때면 얼마나 귀여운지.
귀여움이란 필터는 이렇게도 만능이다. 뾰족하고 모난 물건들도 도드라지지 않게 품을 수 있는 두꺼운 재질로 만든 주머니처럼. 오늘 귀여움 타령을 하며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다. 어제 나는 여러 선생님들을 앞에 두고 발표를 진행할 일이 있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을 놓고 20년 넘게 떠들어 왔는데도 성인들을 앞에 두고 발표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됐다. 무대 공포증 같은 것인지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충분히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일 그 순간이 되니 떨렸다.
발표가 시작되고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워서 더 떨렸다. 무사히 마치기는 했지만 내가 이런 사소한 일에 긴장한다는 사실에 조금 실망해 버렸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퇴근길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근처 카페로 향하는데 문득 그날 C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덩달아 나 자신에게 실망해 버린 뾰족한 마음을 부드럽게 감쌀 주머니도 얻었다. 마흔이 훌쩍 넘은 이 나이에도 잘하고 싶어서, 뽐내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긴장하고 떨다니, 너무 귀엽지 뭐야.
얼마 전 귀여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제목: 귀여워지고 싶다면)을 썼었다. 요지는 귀여움은 무해함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 가장 무해한 존재를 꼽으라면 단연 자기 자신이 아닐까. 나는 나의 서사를 알고 맥락을 알고 의도를 이해하고 결과도 절절히 납득한다. 종종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내가 가장 애틋하고 짠하고 귀하다. 그렇다면 언제든 뭘 하든 귀엽게 봐줄 수 있지 않나.
나는 내가 너무 귀엽다. 책상에 앉지도 않으면서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것도 귀엽고, 11월 한 달간 글을 한 편 써놓고도 나는 (기복이 심한) 박기복이잖아 라며 퉁치는 것도 귀엽다. 살 빼려면 저녁은 간단히 먹어야지 하면서 삶은 달걀 두 개를 먹은 뒤 바나나를 하나 까먹고 과자 한 봉지를 먹고는 끝내 육개장 사발면의 포장을 뜯을 때 "차라리 밥을 제대로 먹는 게 낫지 않아?"라는 남편의 지적에 아랑곳 않는 것도 귀엽다. 그러니까, 나는 귀여우니까, 뭐든 괜찮다. 토닥토닥. (2023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