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

2023년을 마무리하며

by 박기복

올해 잘한 일이라면 국내 여행을 자주 다녔다는 거다. 연초에 올해는 여행을 자주 가자고 남편에게 제안을 빙자한 선포를 해두었다. 홀수달마다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야무지게 실행에 옮긴 결과 예산, 태안, 철원, 광양, 구례, 여수, 속초, 단양, 제천에 다녀올 수 있었다.


1월에 여행지에서 남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여행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게 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여행기를 써서 남겨놓는 거야.


의기양양했을 내 눈빛이 무색하게도,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결국 국내 여행에 관해서는 한 편의 글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게으름 탓이 가장 크다. 하여 곧 2023년이 막을 내리는 마당에 올해를 결산하는 의미로 여러 여행에 대한 짧은 기록들을 남겨볼까 한다.


1월에는 예산과 태안을 묶어서 1박 2일로 다녀왔는데 날씨가 흐려서 그랬는지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어서 이거 몰래카메라냐 우스개 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특히, 맛집을 검색해서 예약까지 했는데 막상 도착한 대규모 식당에 손님이 단 한 팀뿐이었다. 크고 썰렁한 식당 한편에 앉아 향토 음식인 게국지를 먹으려니 입맛이 돌지 않았지만, 이미 오전에 다녀온 수덕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대웅전 기둥 덕분이었다.



(홀수달은 아니지만) 2월엔 철원에 다녀왔다. '철원에는 군부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행할 생각이었다. 물론 실패했다. 얼었던 한탄강이 녹아가는 계절이었다. 부표처럼 띄워둔, 하지만 다리처럼 단단히 엮어둔 물윗길을 걸었다. 주상절리를 감상하는 하늘길(잔도)도 걸었다. 강은 강대로 산은 산대로 볼거리가 풍성했다. 석회암 지대라서 경관이 새로워 수 킬로미터를 걸었음에도 지치지 않았다.



3월에는 봄꽃 여행을 떠났다. 매화로 유명한 광양, 산수유로 유명한 구례를 묶어놓은 여행상품을 냉큼 예약했다. 관광버스 안 배정받은 자리에서 남편은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나는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한참 만에 재개되는 봄꽃 여행이어서 도로에는 차들이, 식당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오른 봄꽃들 탓인지 내내 들뜬 기분이었다.



5월의 여행지는 여수였다. 수년 전 '여수밤바다'라는 노래에 끌려 무작정 여수에 갔다가 현란한 횟집 간판과 시끌벅적한 해안에 실망했던 기억을 새로고침 할 수 있었다. 고요한 바다와 우산을 쓰고 혼자 나선 아침 산책, 스타벅스에서 마신 뜨거운 커피가 기억에 남는다. '낯가리는 책방'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맞은편 카페 '낮일'은 꼭 다시 갈 생각이다. 유람선을 미리 예약해 선상 불꽃쇼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한 경험이었다.



7월에는 여행을 가지 않았다. 8월 1일에 치앙마이로 떠날 예정이라 굳이 국내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태국 치앙마이 나들이는 여행보다는 일상에 가까웠고 물가가 저렴한 그곳에서의 여행을 나는 '부자놀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하였다. 치앙마이 여행기는 '나를 떨게 한 마사지사'​라는 제목의 글로 남겨 두었다.



9월의 여행지는 내가 사랑하는 속초였다. 첫 목적지는 동명항 근처 바다뷰 카페였는데 시원하게 열어젖힌 창문 너머로 파도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그때 비로소 치앙마이가 내게 주지 못했던 것, 그리워하는 줄도 몰랐지만 한동안 그리웠던 것이 바로 바다였음을 알았다. 그즈음 피란 하늘 사진을 자주 찍어댔는데 그게 내 나름 바다를 그리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거다. 바다빛과 하늘빛의 경계가 모호한 것을 본 다음이다.


요란한 파도 소리를 내던 속초 바다
대관람차 속초 아이

11월에는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 유랑쓰의 추천을 받아 제천 나들이를 계획했다. 순전히 두부찌개를 먹기 위해서였다. 단양과 제천을 묶어 1박 2일로 다녀왔는데 정작 단양 위주의 여행이었다. 단양이 시멘트 산업에 의지해 성장해 왔지만, 현재 심각한 인구 소멸 위기라는 것, 패러글라이딩의 성지라는 것을 알았다. 차로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카페 산'에 도착해 내려다본 풍경은 심장을 흔드는 절경이라 특히 잊지 못할 것이다.


도담 삼봉 유람선, 타길 잘했던
카페 산 앞마당에서 내려다본 절경

여러 여행을 하는 동안 날씨는 맑거나 흐렸다. 비가 오기도 했다. 해묵은 대사를 인용하자면,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틈틈이 좋은 책을 조금씩 읽는 것.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본질이다. 게다가 여행 중에는 저절로 좋은 마음이 되었다. 말하자면, 내게 여행이란 좋은 것, 좋아하는 것, 곧 좋아하게 될 것들을 모두 때려 넣은 총체랄까.


굳이 '홀수달마다' 여행을 가겠다고 정해두고 그걸 기어이 실천하는 고집스러운 나와, 여행지를 향해 떠나는 차 조수석에 앉아서야 구체적인 장소를 물색하는 즉흥적인 나. 이 둘이 한 몸을 의지해 살고 있다. 굳이 2023년을 결산하는 마침표가 필요한 나와, 첫 단락을 쓰고 나서 그제야 그럼 여행 얘기를 써볼까 결심하는 나도… 달리 박기복이랴. 어찌 됐든 나는 여행할 때의 내가 가장 좋고 이 고백의 진실성 만큼은 앞으로도 기복이 없을 터다. (20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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