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복의 널뛰기_제7화
나를 깨운 '김주환의 가르침'의 정수를 떠벌려 볼까 한다 라고 지난 회차의 글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3개월이 흘렀다. 떠벌린다고 표현했지만 애초에 괜한 설레발은 아니었다. 나에게 도움이 된 귀한 가르침들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 어쩐지 쓸 수가 없었다. 6화 글을 발행했을 무렵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맡은 업무의 특성상 종업식을 했어도 업무는 남아있었다. 학년말부터 이미 일이 폭주하던 중이었다. 글을 쓸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했던 게 위로였던가 대단한 힐링이었던가. 아니었다. 그저 방학 동안 잘 쉬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면 될 뿐이었다. 나의 기복은 감정 기복이 아닌 에너지 기복이구나, 그때 비로소 알아차렸다. 감정 기복은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 같았는데 에너지 기복은 그저 나의 ‘상태’ 일뿐이었다. 에너지는 원래 기복이 불가피하다. 한탄할 일도, 아무런 일도 아니라서 좋았다. ‘7화에 계속’이라는 5글자가 조금 민망했을 뿐. 매주 요일을 고정해 연재글을 쓰는 방식을 택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아차림‘에는 큰 힘이 있었다. 기존의 생각 회로를 바꿀 수 있었다. 진지해지거나 비관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호흡에 집중하는 것으로 달리 생각할 틈이 열렸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힘, 그게 지혜의 또 다른 정의가 아닐까. 김주환의 가르침에 따르면, 알아차림 훈련(=명상)이 내면 소통의 시작이었다. 편도체를 안정화하고 전전두엽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물론, 몸 안에서 올라오는 여러 신호들을 달리 해석할 여지를 줌으로써 심신의 곤란도를 낮추어 전반적으로 삶을 질을 개선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이 몸의 문제라는 것도 나에겐 획기적인 인사이트였다. 감정적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 내가 써왔던 방법은 ‘생각’이었다. 생각을 바꿈으로써 감정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아니란다. 생각이 자극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몸이었다. 몸이야말로 곧 감정과 맞닿은 통로였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심박수가 불규칙해지면 불안한 것이었다. (통제할 수도 없는) 생각을 제쳐두고, 몸에서 감정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가. 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가르침이었다. 덕분에 더 기꺼이 운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재작년 브런치에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라는 책을 언급한 적이 있다.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인생책이라 부를 만큼 좋아서 몇 번이나 읽었다. 그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진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내가 가진 갖가지 이름들(겉모습, 성과, 직업, 경력, 재산 같은)이 아니라, 매 순간을 알아차리는 나, 현존하는 내가 진정한 나라고 일러주는데 읽는 동안 차근차근한 설득에 압도되어 많은 부분들이 분명해지고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알아차림’에 대한 뇌과학적 근거를 김주환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것이다.
늘 궁금했었다. 내가 왜 이럴까. 살펴보면 감사할 것들 투성이인데, 나를 짓누르는 명확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무겁고 갑갑하다고 느낄까. 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미 상실한 기분일까. 어째서 나는 종종 사라지고 싶을 만큼 괴로울까. 당연한 말이라 머쓱하지만, 그건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이었다. 사소한 시행착오들을 과장되게 해석하고 실망하면서 스스로를 흠집 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고로 쓸데없는 생각은 ‘내가 왜 이럴까’하는 질문이었다. 이상한 일도, 문제도 아니었다. 삶의 한 국면에 마주한 질문일 뿐 흘려보내면 될 거였다.
뇌의 특성상 사람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 밖에 할 수 없다. 에너지를 갉아먹는 부정적인 생각을 즉시 정지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란 대단히 어렵지만, 다른 생각으로 돌리기는 쉽다. 특히 글을 쓰는 것이 그쪽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주변을 관찰하며 글감을 찾는 일이야말로 답 없는 질문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주었다. 떠오른 글감을 주머니에 넣어 자꾸 만지작거리다 보면 할 말이 생겼고, 키워드 정도의 글감을 문장으로 풀어 나가는 사이 예상치 못한 통찰이나 기대 이상의 결론에 도달하면 순정한 기쁨을 얻었다.
<박기복의 널뛰기>를 구상할 때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가장 크게 도움받은 것은 나였다. 지난 수년간 내내 나를 흘겨보았던 것 같다.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어깨를 쥐고 흔들며 타박만 했다. 쓰면서 마음이 녹았다. 닦달하던 마음도, 애쓰던 마음도 다 그럴만했지만 불필요한 일이었다. 내 몸과 마음의 체력, 그에 맞춘 속도와 용량대로 살면 충분히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내 고유의 속도와 용량을 세심하게 알아차리는 일, 다른 사람의 속도와 용량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일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엉뚱한 곳에 불시착했다는 자각이 나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혼란에서 벗어나려는 헛발질들을 징검다리 삼아 어느덧 터널 바깥이다. 나와 보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나의 최선이고 천국이라는 게 보인다. 호불호를 부지런히 가르며 살았었다. 이제야 인생의 모양은 행복이거나 불행의 양극단이 아니라 그 사이를 쉼없이 왔다갔다하는 고군분투라는 걸 알겠다. 답 없는 질문에 에너지를 축내지 않고 지금, 여기의 나로 살고 싶다. ‘생각’을 멈추고 몸을 움직이는 사이, 매 순간을 알아차리려고 용쓰는 만큼, 점점 더 나다운 삶으로 떠오를 수 있으리라. 두둥실. (20240411)
드디어, <박기복의 널뛰기>를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