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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복 Dec 05. 2024

감나무 아래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관하여

감 잡고 싶어요

기억 속에서 감나무에 대한 일화를 찾으려니 무려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기 집 마당에 열려 있는 감을 따주겠다고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낑낑대던 친구의 모습. 그래서 받아왔던 감이 몇 개였던가, 맛있었던가 하는 것은 기억에 없고 따뜻하고 고마웠던 마음만이 남았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감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친구는 한참을 애쓴 끝에 겨우 사다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쉽지 않은 감 수확을 그저 감나무 밑에 있는 것만으로 퉁치려 하는 행태는 당연히 타박과 조롱의 대상일 터. 합당한 노력은 하지도 않으면서 뭔가를 바라지 말라는.


생뚱맞게 감나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내가 요즘 자주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전에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겨서 집 앞 카페로 향한다. 지금도 와 있는데 오늘이 열몇 번째 방문쯤 되려나. 넓은 데다가 층고가 높아서 자꾸 오게 되는 이 카페는 말하자면 나의 작업실인 셈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공상에 잠기고 책도 읽고 글도 쓴다.


특히 브런치 어플을 열고 빈 화면을 노려보고 있을 때 나는 감나무 밑에 누워보는 상상을 한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맛있는 감을 기대하면서 가만히 누워 있는 거다. 감나무 밑에서 파란 하늘을 쳐다보듯이 카페에 멍청히 앉아 높고 커다란 창 밖의 심상한 풍경들을 바라본다.


운이 좋은 날엔 문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무리까지 내달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몇 문장 끼적이다가 말고 서랍에 넣어둔다. 다시 운이 좋은 날, 서랍에 넣어둔 글들 중 하나를 꺼내서 마무리도 짓고 발행도 하게 되는데 어느 날 운이 좋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


그러고 보면 글은 감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익어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인형을 잘 겨냥해서 꺼내는 인형 뽑기라기보다는 잘 익은 감이 저절로 떨어지는 일과 더 가깝지 않으려나. 무르익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감이 익어가는 데는 적당한 햇살과 바람, 물이 필요하듯이  씨앗에 불과한 글감이 글로 완성되려면,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이, 일상에서 마주한 한 장면이, 누군가와 나눈 대화 몇 마디 같은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 제 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끄집어낼 수 있다.


기다리던 감이 지금 당장 떨어지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오늘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감은 내일은 하루치만큼 더 익어서 제 무게를 못 이기고 떨어질지도 모른다. 다만, 딱 한 가지 중요한 건 배나무나 대추나무가 아니라 감나무 밑에 와서 누워있어야 한다는 사실.


생각이나 마음을 온전히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내 능력으론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래도 감나무 밑이라면 감히 기다려볼 만하다. 길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티브이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문장을 노트에 메모한다. 언제 글로 옮겨질지 알 수 없는 ‘메모’들이지만, 감나무로 향하는 좁은 길임은 확실하다.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감나무 밑 그늘이 좋았다고 거기서 바라본 하늘이 멋졌다고 너스레를 떨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다시는 감나무 밑에 오나 봐라 앙심 품지 않고 내가 나무를 잘못 골랐나 한탄하지 않고.


내 궁극의 꿈은 한량이다. 한량의 품격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 감을 따보겠다고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나무 밑동을 발로 차지 않고 하늘을 배경 삼아 조용히 감나무를 올려다보는 일. 그게 2024학년도 한정 시간부자인 박기복이 누리고 있는 최고의 사치일 것이다. (20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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