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_02
무려 1998년의 일이다. 헤아리자니 다섯손가락을 몇번이나 감았다 폈다 해야할만큼 오래된 옛날이야기다. 3월이었고 봄이었다. 나는 이제 막 대학교 2학년이 되었고 지금 생각하면 별 공감도 되지 않을 소소한 썸으로 인해서(그 당시엔 그런 표현도 없었지만) 심란함을 느끼고 과생활에 재미를 못붙이고 있던 참이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문제 해결 방식은 한결같다. 손쉬운 선택. 새로움으로 도망치는 것.
신입생들을 포섭하기 위한 동아리 홍보가 한창인 때였다. 캠퍼스의 어느 한구석에서 불교학생회 동아리 홍보 글을 보게 되었다. 궁서체의 손글씨가 자못 경건해보이기까지 했고,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에 종교만한 것이 없겠다 싶었다. 마침 친한 친구도 불교동아리에 관심을 보였다. 용기를 내서 함께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날 마지막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삐삐 진동이 울렸다. 처음보는 번호였다.
불교동아리 회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시작되는 음성 메시지는 잠깐 얼굴을 보자는 용건을 담고 있었다. 장소는 법대 후문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갑작스런 만남 제안에 어리둥절했지만 법대 후문은 사대 건물에서 멀지 않았고 마침 함께 신청서를 낸 친구도 같이 있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그다지 많지 않은 법대 후문 앞 벤치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눈인사를 하고 나란히 앉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남자에게 반했다. 옆에서 본 그의 속눈썹은 참 길고도 예뻤다. 이마에서 이어지는 콧날은 반듯했고 까무잡잡하지만 잡티없는 맨들한 피부와 까만 눈동자, 조근조근 막힘없이 해야할 이야길 하면서도 중간 중간 웃음을 섞어가며 농담을 하는 넉살과 여유. 같은 2학년이었지만 재수를 해서 그런가 뭔가 능수능란하다고 해야할까. 스물 한살의 내가 동경하던 많은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향기가 났다. 향수를 뿌렸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여자 친구가 있을까.
용무는 이러했다. 곧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데 2학년이 동아리에 가입하는 일은 흔치 않으니 같은 학년으로서 미리 한번 만나서 안면을 트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싶었지만 회장의 책임감은 이런 것인가보다 라고 좋게 봤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 애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게 다 그럴싸해 보였다.
그의 옆선과 속눈썹과 향기가 며칠이 지나도록 생각이 났다. 한 눈에 반한다는 게 뭘까 싶었는데 이런 건가. 우여곡절을 거쳐 그해 가을 우리는 서로의 첫번째 연인이 되었다. 언젠가 처음 만났던 그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너한테서 향수 냄새가 났는데 되게 좋은 냄새였다고 말했다. 그 친구가 자기는 향수를 뿌린 적이 없다고 심지어 뿌릴만한 향수도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논리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불가사의한 현상 가운데 하나를 내가 겪은 것이라고, 사람이 사람에게 한눈에 반하는 일처럼 아주 특별하고도 드문 일이 일어난 그날, 뿌리지도 않은 향수 냄새를 맡아버린, 말 안되는 일 하나쯤 있어도 전혀 어색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으로 남았지만, 나의 봄에 관해서 이 이야기를 빼놓는다면 무엇을 쓰든 그건 거짓일 수 밖에 없다.* 해야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는 거짓일테니까. 봄이었고 설렜고 무려 첫사랑이었다. 단정한 옆선과 반듯한 궁서체를 가진 그 친구를 만난 1998년 3월의 마지막날.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났다. (20220410)
*온라인 글쓰기 수업의 과제가 마침 봄을 주제로 한 글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