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친구

J를 추억하며

by 박기복

법 없이도 잘 살만한 착한 우리 엄마가 저지른 명백한 불법행위가 있다. 공소시효가 한참 지났으니 고백해보자면 바로 위장전입이다. 지역에서 평판이 좋은 여중에 딸을 진학시켜야겠다 마음먹은 엄마는 먼 친척에게 부탁해 나의 주소지를 그 집으로 옮겨두었다. 실제 거주지에서 자연스럽게 배정받게 될 남녀공학 중학교는 신문에 오르내릴 정도로 사건사고가 많았다. 엄마로선 딸의 앞날이 걱정될 만도 했다.


6학년 때는 유난히 주소를 자주 조사했는데 해당되는 곳에 손을 들라고 할 때마다 나는 마음을 졸이며 살지도 않는 동네에 산다고 거짓을 말해야 했고 그건 소심한 나 같은 아이에겐 큰 스트레스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 이상 지난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시절 엄마가 결정한 위장전입은 비록 불법이긴 했지만 내 인생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유난히 좋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친구는 J였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학기초에 짝꿍이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세명씩 번호대로 앉혔는데 마침 나와 J의 번호가 1번, 3번이었다. 피부가 하얗던 나와 정반대로 피부가 까맣던 그 친구는 운동에 젬병이던 나와 달리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체육 시간마다 빛이 났다. 성격이 활달하고 목소리가 컸으며 활짝 웃고 다녀 어디서든 주인공 같은 느낌을 주는 친구였다.


어느 봄날 사회 과목의 조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J의 집에서 만났다. 버스가 다니는 대로를 향해 지어진 그 집은 밖에서 봐도 부잣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계단을 몇 개 오르면 잔디가 깔린 정원이 나오고 거기서 계단을 또 오르면 다시 넓은 잔디가 펼쳐져 있었으며 잔디의 끝에 하얀 이층 집이 있었다. 그 집 이층에 J의 방이 있었다. 우리 집 안방보다 큰 그 방을 보고 주눅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 봄날을 시작으로 우리 둘은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어 방과 후엔 통화를 하고 틈만 나면 편지를 주고받았다. 쉬는 시간이면 무조건 함께 교정 구석구석을 누비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로 연신 깔깔댔다. J와 있으면 나도 평소보다 더 밝고 씩씩해지는 기분이었다. 학교 가는 게 즐거웠고 내가 J의 단짝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웠다.


전화 통화나 편지가 식상해진 날엔 테이프에 목소리를 녹음해서 주고받기도 했다. 서로를 필사적으로 웃기려는 갖은 노력을 담아 녹음을 했고 상대가 녹음한 테이프를 받아서 듣는 동안 숨차게 웃기도 했다. 개그 코드가 맞다는 것도 우리의 우정을 끈끈하게 하는 요소였다.


가을 어느 날 J의 집에 놀러 갔을 때는 선물을 주겠다며 정원으로 나를 데려가 사다리까지 동원해 감나무에 달린 감을 따주었다.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는 친구가 마냥 고마웠다. 그가 사다리에 매달려 막대기를 휘두르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랑한다고 끌어안고 쉼없이 애정을 표하던 친구, 뭐든 아끼지 않고 주려던 친구. J를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이 뜨끈해지는 기분이다.


우리가 만약 1년 늦게 2학년 때 만났다면 단짝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춘기의 터널을 J는 요란하게 지났고 속칭 '날라리’라 불리는 부류로 변화해갔다. 복도에서 만나면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그뿐이었다. 이질감에 귀신같이 민감하던 시기, 우리는 서로 다른 길에 놓여있다는 걸 알았고, 각자 앞을 향해 걷다가 그렇게 시간과 함께 멀어져 버렸다.


수년 뒤 싸이월드를 통해 J와 상봉했다. 24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해서 이미 유치원에 다니는 연년생 남매를 둔 J가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 옛날 범생이와 날라리 사이만큼이나 확연히 동떨어진 트랙을 돌고 있었던 탓인지, 방명록에 열심히 안부를 남겼을 망정 직접 만날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가끔 궁금하다. 미니홈피 속에서 환히 웃던 귀여운 J의 아들딸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어떤 인연은 오래 이어지고 또 다른 인연은 짧게 머물다 간다. 아쉬워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강물이 흘러가는 걸 보듯 그냥 바라볼 뿐이었다. 한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들추어 글을 쓰다 보니 J 말고도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강가에 선 나는 갑자기 엉엉 울고 싶어진다. (2022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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