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마라톤
지난 주말 ‘한강 벚꽃 마라톤’ 현장에 다녀왔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작년부터 러닝에 열심이던 남편이 몇 주 전 들뜬 얼굴로 10km 마라톤을 신청했다고 말했는데, 토요일이 바로 마라톤 당일이었다.
남편은 새벽 6시 반에 집을 나섰고, 나는 겨우 눈만 떠서 누운 채로(이런 식도 배웅이라면) 배웅을 하고 도로 잤다. 경기 시작은 9시. 남편이 결승선에 도착하는 10시쯤에 맞춰서 나도 도착할 생각이었다. 완주를 마친 영광의 순간을 꼭 찍어주겠노라 큰소리를 뻥뻥 쳐둔 참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지만, 남편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한다.
남편이 내 말을 빈 말로 들은 줄 알았다면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었는데. 8시 반쯤 일어나 전날 밤 짜게 먹어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부랴부랴 준비를 마쳤다. 근데 지하철로 80분이나 걸린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혹시나 싶어 네비를 찍어보니 차로는 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가 강변북로는 한산했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으로 공기는 쌀쌀했지만, 도로변 노란 개나리가 반가웠다. 네비가 예측한 시각에서 1분의 오차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제는 주차였다. 그 넓디넓은 주차장이 차들로 가득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든 상황이었다.
차 댈 곳을 찾기 위해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알림음을 울리며 속속 결승선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핸드폰 카메라를 장전해 놓고 남편을 기다려야 할 바로 그 지점이었다. 주차장 빈자리는 끝내 찾지 못하고 연락이 오면 바로 달려가 차를 빼줄 요량으로 결승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이중 주차를 했다.
결승선으로 사람들이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5km, 10km, 하프 경기가 동시에 진행 중이었고, 주자들이 가슴팍에 매달고 있는 번호판의 색으로 종목이 구분되었다. 양 옆 펜스 너머로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 사이 빈 공간에 나도 섰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경기를 주관하는 영희처럼, 나는 센서를 곤두세우고 주자들의 얼굴을 스캔했다. 남편을 찾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부지런히 눈을 굴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뒤늦게 “어? 언제 도착했어?” 놀라며 사라지곤 했다. 나도 그러려나 조바심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편한테 착장이라도 물어볼 것을. 어떤 복장으로 나타날지 알 수가 없으니 오로지 ‘얼굴’만 보고 찾아내야 하는 거였다. 그래도 함께 산 세월이 얼만데. 가족은 멀리서도 눈에 띄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찬 바람에 떨며 한참을 기다렸다.
주자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결승점을 향해 들어왔다. 달리던 모양과 속도를 끝까지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결승선을 통과하는 자신을 직접 촬영하려 휴대폰이나 장비를 든 사람도 있었고, 갑자기 몸을 틀어 뒤로 달리면서 일행의 모습을 찍어주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두 손을 꼭 붙잡고 들어오는 남녀 주자, 막판 스퍼트를 내며 질주하는 사람,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에게는 저절로 눈이 갔다.
빠르게 시선을 옮기며 사람들의 얼굴을 스캔하는 사이, 한 가지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건 그들의 얼굴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어도, 크게 웃음을 짓고 있지 않아도, 심지어 지쳐 인상을 쓰고 있어도 그랬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광채랄까.
남편은 작년부터 운동을 다녀와서는 러닝머신 위에서 얼마나 뛰었는지를 종종 자랑했다. 오늘은 속도를 높였다든가, 이번엔 훨씬 긴 거리를 뛰었다든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눈은 반짝거렸다. 연골을 걱정하는 나는 러닝머신 위에서 오직 걷기만 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에 심드렁할 뿐이었다.
마라톤 경기에 참가 신청을 했다고 말한 다음부터 남편은 올림픽에라도 나가는 선수처럼 진지했다. 규칙적으로 달렸고, 체중을 감량했다. 식단을 바꾸고 술 약속을 끊었다. 얼굴을 빛내며 지금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저들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어쩐지 뭉클했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고 달리고 달려서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리라.
여전히 부은 눈을 하고 서서 낯선 이들의 얼굴을 훑으며 나는 생각했다. 사람은 역시 밥만 먹고는 못 사는 존재라고. 먹고사는 건 절체절명의 중요한 문제이지만 또 그것만으로 다가 아닌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고. 굳이 안 해도 되는 도전을, 고생을 일부러 선택하고, 한 줌의 성취감이나 자긍심을 위해 기꺼이 많은 것을 걸고 인내하고 희생할 수 있는 게 사람 말고 또 있을까.
느닷없이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남편이었다. 열이 많으니 당연히 반팔을 입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긴팔 외투까지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나를 먼저 알아봐 주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찾아내진 못했을 터였다. 놀란 나는 그제야 핸드폰을 깨워 카메라를 활성화시키려고 했으나 어버버 하는 사이에 남편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겪은 낭패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중요한 순간이니 사진으로 남겨야 했다. 결승선을 이미 통과해 버린 남편을 세워놓고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지난주 연습 때보다 기록을 단축했다고 자랑하는 그는 행복의 나라에 서 있었다. 세상 가장 눈부신 얼굴로.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