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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랄라 Jan 28. 2020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오감의 열림을 경험하는 것

덴마크 스카겐 여행기

   덴마크 여행 하루 전날이었다. 자동차 여행을 계획하였던 남편이 윈터 타이어의 공기압이 맞지 않는다고 카센터에 다녀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정비를 위하여 정비공간의 레일 안으로 들어가던 중  남편이 레일 옆 기둥 모서리에 범퍼를 <쾅>하고 박아 버렸다. 일이 일어나려면 기가 막히게 일어난다고 범퍼가 떨어져 나가 버렸다. 차를 수리하려던 사람도 입이 쩍 벌어졌을 것 같다. 아마 그 정비소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되고 남을 일이 아닌가 싶다.


   떨어져 나간 범퍼와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여행을 취소할 것인지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여행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스웨덴 헬싱보리에서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쳐 레고랜드, 스카겐까지 4박 5일의 숙박비와 레고랜드 티켓비를 전부 날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참 묘한 존재다. 환불되는 표가 하나도 없자 오히려 오기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반드시 가고야 말리라는… 마침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가 신나게 노래 부르며 부엉이 인형과 초콜릿, 사탕까지 본인의 여행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모습을 보니 여행에 대한 의지가 더욱 불타 올랐다.


<가자!>


   남편은 곧 렌터카를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용카드가 없으면 렌트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 북유럽이라는 것을 렌터카 직원을 통해 알게 되었다. 렌트할 차를 고르고, 싸인 바로 전에 신용카드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렌터카 직원의 그 어이없고 한심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렌터카 직원의  <It’s okay>라는 말이 <너네 바보지?>, 그리고 그 앞에 서있던 딸아이가 <여행 못가도 괜찮아요>라는 말이 <안 가기만 해 봐라>로 들렸다.


   결국 우리의 선택은


<대중교통>


   덴마크 스카겐을 제외한 모든 곳의 숙박비와 티켓 비용을 포기하고 (대중교통으로는 도저히 스케줄을 맞출 수가 없기에) 스카겐에서 3박을 하고 돌아오기로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과 나의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하는 단세포 기질이 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차가 없어도 <가서 실컷 자연을 느끼자>로 낙찰된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스톡홀름을 나와 예테보리, 덴마크까지 대중교통과 배편을 이용하여 도착해 보니 족히 12시간이 넘어 걸렸다. 밤늦은 시간에 마지막 기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여 모두들 이만 닦고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아침의 고요가 참으로 편안했다. 차 소리 하나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의 적막함이 늦게까지 뒹글 거리는 기분 좋은 나른함을 주었다. 고생해서 왔지만 잘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인생은 롤러코스터라고 하였나? 고요한 아침의 편안함이 롤러코스터가 하강하기 바로 전의 긴장감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와 깨 닫는다.

   밥을 챙겨 먹고 나가 보니…이 마을에는 대중교통이 없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2시간에 한 대씩 버스가 드문 드문 운 좋으면 시간 맞춰 다니는 그런 시골 마을에 우리가 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편의 해결책은 매우 간단하였다.


<걷자!>


걷고 또 걸었다. 또 걷고 또 걸었다. 딸아이의 재잘 거림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발바닥부터 종아리, 허벅지까지의 근육들이 통증을 호소한다. 아프다고 불평 거리니 다시 한번 남편이 해결책을 제시한다.


<천천히 걷자!>


   간간이 지나가는 동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자동차 외에는 사람도 건물도 없는 거리를 매우 오랜 시간 걷고 또 걷고,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걷다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스카겐의 자연


   묘하게 비슷한 듯 다른 이름 모를 잡초들의 다채로움, 거칠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겨울의 한적한 바람소리, 푸른 하늘빛의 청량함, 규칙 없는 해안가의 흐드러 퍼지는 파도의 모습들, 그리고 바닷가 모래밭, 그 척박한 땅에 꿋꿋이 피워낸 들꽃의 향이 느긋한 발폭의 리듬에 맞춰 매우 천천히 나의 오감 안으로 들어왔다. 입을 벌려 바람의 맛을 느끼고, 들꽃의 향기도 맛본다. 경적소리 하나 없는 태초의 자연 안에서 시간의 여유와 함께 찾아든 오감의 열림이 나라는 존재를 확인시켜 주듯 모든 감각들을 촘촘히 채워주고 있었다. 그 열려진 감각들 안으로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이 물결처럼 잔잔히 밀려들어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데, 내 인생 첫 유성을 보았다. 남편도, 나도, 딸도 소원 빌었어?라고 소리치는데, 모두가 너무 빨리 지나가서 제대로 소원을 빌지 못하였다.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뱃살 빠지게 해 주세요!”

   “자전거 사고 싶어요!”

등등 뱉지 못한 소원들을 아쉬워하며 늦은 밤 숙소로 도착하여 그날 걸은 총거리를 확인해 보니 19km였다.


   <가자!>, <걷자!>, <천천히 걷자!>의 3단계 솔루션을 제시해 준 남편과 잔 투정 없이 묵묵히 걸었던 딸아이가 이 여행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해진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감각기관들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 이런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좀처럼 느끼지 못하며 바쁘게 살았는데 해프닝같이 시작된 이 여행이 나에겐 매우 귀한 여행이 되어 버렸다. 떨어져 버린 유성의 속도처럼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천천히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 뚜벅이 여행의 감흥이 나는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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