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랄라 Feb 11. 2020

참 다양한? 인종차별

우리 그냥 사랑하며 살아 보아요!

   인종차별... 매해 설날이나 추석이 찾아오는 것처럼 잊혀질 만할 때 즈음 항상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예상치 않은 곳에서 위풍 당당히 찾아오곤 하는 그것!

   15년 동안의 해외 살이를 통해 겪게 된 갖가지 인종차별은 그 정도에 따라 중증 후유증을 동반하는 심각한 내상을 입히기도 하고, 반창고나 후시딘 정도로 낳을 수 있는 작은 찰과상을 내기도 하는데, 그 상처의 깊고 미미함에 따라 인종차별의 종류도 구별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 별로 기분 안 나쁜 인종차별


   초등학교 2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우리 동네에 한 흑인 아저씨가 택시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친구들 중에 누군가가 "구경하자!"라고 외쳤고, 그 소리와 함께 우리들은 그 흑인 아저씨를 둥그렇게 둘러싼 채 "와~~ 진짜 까맣다"하며 온갖 관찰을 하였다. 내 인생에서 처음 본 흑인 아저씨의 얼굴이었고 그의 다른 생김새가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흘러 역지 사지의 일을 당하게 되니 그 시절의 <무지에서 오는 호기심>을 돌이켜 기억해 보는 것은 내가 당한 비슷한 종류의 인종차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된다. 미국의 중부나, 영국의 시골 마을 또는 관광지를 제외한 동유럽을 다닐 때마다 나는 그 흑인 아저씨가 떠오른다. 고개를 90도 이상 돌려가며 뚫어지게 쳐다보는 <무지에서 오는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만날 때마다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종류의 인종차별은 그다지 기분 나쁜 것은 아니다. 몰라서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려면 지나칠 수도 있는... 그리고 때로는 그래! 실컷 보세요! 정도의 관대함이 생겨날 때도 있다.

   남편이 다니는 학교에 프랑스 시골에서 온 학생이 남편이 도시락 먹는 모습을 흘끔흘끔 하도 쳐 다 보길래, 남편이 직접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 왜 쳐다보니?" 그 학생이 대답 왈 " 아시아인이 젓가락질 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처음 봤다는, 그래서 너무 신기하다"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한라산 시골 중턱 출신의 남편이 "너 너무 촌놈 같다"며 타박을 주고 젓가락질 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2. 정말 기분 나쁜 인종차별


   두 번째는, 가장 기분 나쁜 차별의 종류로 영국 런던에서 겪었던 일이다. 친한 친구와 밥먹으려고 하는데, 어떤 중년의 영국 부인이 자신들이 먼저 왔다며 식당 직원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가 먼저 도착한 것이 팩트였고, 정중하게 우리가 먼저 도착하였다고 그녀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우리의 시선을 피해 <벽을 보며>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시선조차 우리에게 두기 싫다는 듯이... 그리고 레스토랑 직원은 그녀에게 먼저 자리를 주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가족이 런던 레스토랑 (또 런던이다)에서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지정받은 테이블로 다가가니 그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던 우리 딸 또래의 아이를 둔 한 가정이 본인들의 테이블을 옮겨 달라고 레스토랑 직원에게 요구를 하였다. 식사를 하던 도중에 말이다. 레스토랑 직원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우리를 보기 시작했고, 우리도 기분이 언짢아 중국 식당으로 갔던 기억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이야기하였던 <선을 넘어오는 냄새>와도 맥을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박사장 네 집에서 취직하고 잘 살던 기택이 <냄새>라는 말에 감정이 매우 동요되었듯이, 나 또한 그들의 <차별과 무시>에 감정이 동요되었<정말 기분 나쁘다>라는 말을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내 하였던 경험이 있다.


3. 신체적 위협이 느껴지는 무서운 인종차별


   2016년 6월이었다. 영국(인종차별은 사실 영국에서 많이 경험했다)에서 브렉시트를 묻는 국민투표가 이루어지고 투표자의 52프로의 사람들이 EU 탈퇴의 결정을 내린 바로 그 날, 우리 가족은 평소처럼 마트에서 소소히 장을 보고 걸어가던 중이었다. 바로 그때 오픈카를 탄 4명의 대머리 남자들이 우리가 있는 인도 옆으로 차를 붙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Go back to your country... fucking.... ugly...."

   갑작스러운 외침과 그들의 외형적인 모습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남편은 장을 본 비닐봉지를 잽싸게 나에게 건넨 뒤 아이의 두 귀를 막고 <뛰어>라고 외쳤다. 사색이 되어 뛰어가는데 뒤에서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최악의 경험이었고, 기분 나쁨을 넘어 공포감을 느꼈다. 그날은 우리 말고도 동양인들, 아랍인들, 인도 사람들이 심한 말을 많이 들었다더라... 등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4. 마음 아픈 인종 차별


   아이의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5, 6학년의 고학년 학생들이 어린 1, 2학년 아이들의 손톱에 매니큐어도 발라주고, 케이크도 팔고, 스티커와 페이스 페인팅 같은 아기자기한 활동들을 준비하여 기부금을 마련하는 행사였다. 동전을 챙겨간 만 다섯 살이 된 딸아이가 학교 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매우 재미있는 것을 배웠다는 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양쪽 눈으로 가져가 쭉 찢어 대면서 계속 웃는 것이었다. 자초 지종을 들어보니 유일한 동양 아이였던 딸아이가 6학년 반에 가자마자, 6학년 학생 중 한 명이 양 손으로 눈을 찢고 웃어 대었고, 그중 또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딸아이를 향해 손가락으로 눈을 찢으면서 놀린 것이었는데, 아이는 뭣도 모르고 자기랑 재미있게 놀아준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눈을 찢는 표정을 따라 짓자 그 반에 있는 학생들이 박장대소를 하였고, 아이는 이것을 'So Cool'한 장난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물론 학교에 가서 적절한 항의도 하였지만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었다.


   이외에도 꽤 오래 생각해야 당했다는 것을 깨닫는 교묘한 인종차별의 종류도 있고 상당히 소극적이며 잠재적인 인종차별의 종류가 상당수 존재하기도 하지만 각설하고 결론을 맺어 본다면, 대부분의 인종 차별의 발생은

<인종차별의 위험성을 차별을 행하는 이들이 직접적으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도래하는 공통점이 보인다.  

다르다는 것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배움이고 나를 넓혀가는 확장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의 폐쇄성으로 자신을 무장해 버리고 타인에게 아픔을 주는 과오가 계속되는 것이 안타깝다.


   영어를 전혀 못하던 미국 생활 첫해, 교통신호를 어겨 경찰에게 잡혔던 경험이 있다.


"You can't turn right on a red light, Where do you come from?."

"YES!"

"Can you show me your drive license?"

"I HAVE MY HUSBAND."


   말이 전혀 안 통하는 동양 여자를 짠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이 지긋한 경찰관의 모습이 떠 오른다. 한숨을 푹 쉬며 " Please, drive safe, and good luck to you"라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던 그는 확실히 자신과 매우 다른 타인을 긍휼함의 시선으로 거두어 드린 여유와 관대함이 있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는 성경의 구절처럼 많이 서툰 인간에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주신 것이 아닐까?라는 따뜻한 상상을 해 보며 이 글을 덮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친구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