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기암에 올라서니,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인다.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은 경계에서 나는 한낱 작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자연으로 돌아갈 때는 한 줌밖에 안 되는 흙이겠지. 파란 하늘은 끝없이 펼쳐지고, 구름은 흡사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산과 같다. 거친 바람 소리와 어우러진 고요는 깊은 자연의 숨결로 다가온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하는 탄식이 절로 나게 한다. 마치 한라산이라는 제목으로 자연이 커다란 화폭에 가을을 담아 놓은 것 같다. 짙은 녹음은 이곳까지 올라오기 힘들었는지 갈색의 작은 나무들로 변해 있다. 그래도 서로 어우러져 자연의 색채를 뽐낸다. 점점 빛이 들고 그림자가 스며들며 시간의 흐름을 조각해 낸다. 나는 거기에 서서 자연의 시간에 동참하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마치 한라산이 내게 속삭이는 말처럼 들린다. “너는 내 안에서 작지만, 매우 소중한 존재야”. 이 속삭임은 산 아래 도시의 소란함과는 전혀 다르다. 나지막하지만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난다. 욕심, 두려움, 걱정, 불안 등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이 여기서는 바람에 흩어지고, 남는 것은 자연과의 조화뿐이다.
하산하더라도 이곳에서 느꼈던 모든 감각이 나를 다시 지탱해 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라산은 단지 높은 봉우리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안아주는 품이며, 나에게 침묵 속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