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훤한 숲 May 14. 2022

43살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만

출산 편


지난한 임신기간을 지나고 나는 건강한 딸 쌍둥이를 낳았다. 임신기간 동안 이벤트 아닌 이벤트가 있었고 임신 당뇨 판정을 받아 식이 조절을 해야 했다.


사실 임신 당뇨는 순전히 내가 검사 당시 귤을 너무 많이 먹어서였다. 하루에 한라봉을 네 개씩 까먹고 귤도 두 달 동안 얼마나 먹어치웠던지… 막상 임당 판정받고 식단 조절을 했더니 의사가 식사를 못하냐며 물어보기까지 했다. 임신하는 동안 전체 15킬로가 쪘고, 출산을 하고 조리원 있는 동안 관리받아서 12킬로가 빠졌고 집에 와서 3킬로가 다시 빠졌다.


그러나,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 8킬로가 쪘다. 산후도우미 기간에 관리사님들이 모유가 잘 나오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된다며 하루에 두유 2개, 우유 2개와 약밥 1개를 추천하셨다.


그러나, 나는 왜 그렇게 속이 허했던지… 하루에 두유 4개, 우유 4개, 갖은 떡과 케이크, 그리고 삼시세끼 미역국에 불고기까지… 그러니 살이 안 오르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또 산후조리한다고 다들 또 쉬라고 해 ㅋㅋㅋ 애들 모유 줘야 되니깐 어디 나가지도 못해… 그러니 살이 찌지… 그렇게 붙은 살은 단유를 해도 그대로 내 몸에 그대로 나와 같이 살고 있다.


아이를 낳은 지 6개월 만에 단유를 하고 나서 다이어트를 시작했지만, 3개월 동안 빠진 건 단 2킬로.

쌍둥이 육아를 하다 보니 안 먹으려고 하면 안 먹을 수 있었고, 보통 7시면 육퇴여서 운동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애들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도 1~2 시간. 도무지 살이 안 빠지려야 안 빠질 수가 없는데 안 빠지더라는…


주변에 육아로 힘들어서 살이 안 찔 거라고 했는데…젠장, 이거 뭐 이렇게 안 빠져?


거울을 보면 웬 유도선수가 한 명 있다. 머리는 미역처럼 늘어뜨려져서 누군지… 그뿐인가? 얼굴은 피곤에 절어있고, 기미에 주근깨에 피부색은 누르튀튀… 뱃살은 뱃가죽이 축 늘어나 있고, 골반과 등에는 살집이 생겨서 왜 저렇게 튀어나왔는지…


내가 쌍둥이 임신했다고 했을 때 그냥 남자인 친구 한숨이 금방 50대 되겠다고 했는데…(이누므 새끼) 진짜 이렇게 늙어가는 건가 우울할 틈도 쌍둥이 엄마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거울을 볼 때마다 저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다이어트를 하며 등살에 접히는 살 두께가 점점 얇아지고 빵빵했던 배가 흐물거려지면서 그래도 살이 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체중계에 올라갈 때마다 줄지 않는 체중을 보고 속상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그래도 체중보다 건강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고 꾸준히 진행 중이다(아, 이런 정신 승리가…)


출산을 하니 호르몬의 노예가 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는데 진짜 나도 호르몬의 노예가 됐다. 사실 40년 전 육아를 하신 시어머니와 갈등이 좀 있었다.


나는 원래부터 모유수유를 하고 싶었다. 완모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다들 힘들다고 뜯어말리더라. 아이들이 쌍둥이치곤 건강했지만, 아무래도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젖을 빠는 힘이 약했다. 그래서 나는 조리원에서부터 유축을 해서 먹였는데 집에 와서도 잘 빨지 못했다.


모유수유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직접 모유를 빨리는 것보다 유축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 손도 아프고 그걸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아이를 케어할 수도 없고 내가 딴짓도 못한다.


시어머니는 나를 걱정해서 모유수유를 말린다고 했는데 지나고 보니 모유가 별 영양가없다고 생각해서인 것도 같았다. 자기가 물젖이라 의사가 먹이지 말라고 했다는… 무려 40년 전의 잘못된 육아상식으로 도와준다는 핑계로 오만가지 참견을 다하니 우울증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었다. 또 시어머니는 산후관리사님처럼 교육받은 것도 아니니 산모에 대한 배려는 당연히 1도 없었다. 시어머니들은 왜 며느리들을 자기 졸병쯤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시어머니 보고 집에 가시라고 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몸도 내 몸이 아니요, 쌍둥이니 손 하나가 아쉬워서 꾹꾹 참았다. 내 마음 편하자고 애 하나를 굶길 수 없으니깐…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생각해봐라. 신생아는 두세 시간을 한 사이클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오줌을 싼다. 그런데 두 아이가 사이클이 같으냐? 그렇지 않다. 하나가 잘 때 하나가 먹으면 상관없다. 하지만 보통 같이 먹을 때도 많다. "그럼 양쪽 다 모유수유를 하면 되잖아요" 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신생아 때는 애들이 목을 잘 못 가눠서 동시 수유가 어렵다. 또 우리 애들은 조산아. 그것도 빠는 힘이 있어야 시도해보지. 혼자서 양쪽으로 젖병 수유를 해주는 방법도 초기엔 어렵다. 애들이 목을 못 가눠서 사래도 많이 걸리고 분유 먹다 사고도 많이 난다. 아무리 역류방지 쿠션 등 육아 템을 쓴다 해도 아이가 먹는 동안 봐줘야 하고 트림도 다 시켜줘야 한다. 건.강.하.게.무.탈.하.게 키우고 싶다면 이건 필수다.


시어머니가 처음 육아를 도와줬을 때는 아이를 뺏긴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가끔 아이들 보러 내가 자고 있는 안방에 들어왔을 때는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건 과대망상인  같지만,  당시엔 그랬다.  친구들은 호르몬 때문일거라고 했다. 자꾸 직수 고집하지 말고 백일까지 유축해서 먹이라고 하고, 직수 성공했을  모유가 간식이라는 . 모유 수유텀 무시하시고 분유 먹이시니 난 무엇을 위해 모유를 멕이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가 싶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이던 어느 , 시어머니가  모유가 간식이라는  하는 얘기를 하니 그동안 쌓였던 것이 폭발하여 나는 가출 아닌 가출을 감행했다. 지금.생각하면 별거 아닌데 그때는 왜그렇게 그말이 귀에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모성애가 듬뿍담긴 호르몬의 영향으로 내 모유가 부정당했다는 분노집을 나가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갈 때가 거기뿐. 남편과 우리 집에 와서 시어머니와 함께 아이를 돌봐주던 친정엄마의 전화가 계속 왔다.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애 하나였음 그대로 애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는데, 애가 둘이라 차가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 게다가 난 장롱면허. 때마침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하소연을 하니 기분이 좀 많이 나아졌다.


세 시간의 반항 끝에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니, 집엔 시어머니의 울음소리로 가득. 자신의 입을 탓하시며 눈물 어린 사과를 하셨다. 또 그렇게 나오시니 내가 화를 안 풀래야 안 풀 수가 없는 상황.


하지만, 그후에도 육아에 지친 시어머니는 종종 나에게   말을 던지거나 이유식  온갖 참견을 하셨고, 무례한 행동도 많이 셨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있지만, 험담이 될 것같아 쓰지 않으련다. 람은 안 바뀐다.


쌍둥이라는 얘기를 듣고 임신기간 동안 나는   번도 후회를  적이 없다. 쌍둥이라서 이벤트 때문에 거의 집에만 누워있었고, 막판에 기어 다녔지만(하지만 저때는 괴로웠다). 애가 하나였음 저렇게 부당하다고 느낀걸 참지 않았을 텐데 애가 둘인 죄로 참아야 됐다. 친정에 가려해도 혼자 애둘을 데리고 움직일  있어야지사실 이후에도 시터를 부르려고 했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의 반대가 있었다. 남에게 돈 주느니 내수로 돌리자는 이유에서였다.


출산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시어머니가 옆에서 참견을 너무 하셔서 육아와 관련된 수면교육, 모유수유 등은 모두 시어머니가 없을  시도했고, 다행히 모두 성공했다.


이런 덕에 그때처럼 시어머니가 나에게  놔라  놔라 하지 않지만, 여전히 뭐만 하면 참견을 하신다. 조언이라면 조언인데 내 귀에 그간의 쌓인 것이 있어서 조언이라고 들리기보다 내 꼬투리를 잡으시는구나라도 느껴졌다. 남편의 잔소리는 분명 시어머니를 닮았을 이라고 생각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나는 시어머니를 만난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는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허리가 나가는 바람에  시어머니가 집에  계셔서  글을 쓰고 있다. 처음 오신 하루는 내 눈치를 보시니깐 그렇게 막말은 안 하시지만, 육아가 고되면 여전히 나에게 날선 말들을 던지신다. 거기에 욱한 나는 지금 불평어린 글을 쓰고 있다.


 정도 되면 시어머니가 나의 창작의 근원인 . 육아가 힘들어서 쓸 겨를이 없는데 욱한 마음에 잠이 안 와서 끄적이고 있으니깐…


옛말에도 있듯이 변소 간이랑 시집(?) 멀수록 좋다. 젠장, 나는 변소 간도 가깝고 시집까지  시간이면   있는 교통이 무지 발달한 21세기에 살고 있다. 당분간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을  같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자주 뵙지 않으니 창작의 샘이 말라간다.

























작가의 이전글 43살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