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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서른여덟, 서른아홉

올해 서른여덟이 되었다. 원래 한국 나이로는 불혹,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마흔이다. 그런데 지난해 6월부터 시행된 ‘만 나이 통일법’에 따라 30대로 살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늘었다. 감사해야 할지 구차하게 만 나이 계산을 멈추고 쿨하게 원래 한국 나이대로 지내면 될지 고민이 됐다. 그러다 문득 쿨한 척하며 사는 것도 이제 멈출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세상일에 갈대같이 흔들리는 건 물론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아홉 수의 성장통을 다시 한번 겪어내며 30대를 잘 마무리 짓고 꽃중년으로 넘어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40대가 꽃중년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이 되었을 때, 우연히 ‘나는 38년 된 병자입니다’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주님의 시선’이라는 노래를 듣게 됐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정말 귀신같다.) 가사는 이렇다.  

    

흐르는 시간이 한숨만 남기고/ 반복된 실패 속 지쳐갈 때/ 내 맘의 소망이 눈물 조각될 때/ 내 곁에 다가와 부르시네/ 주님의 시선 나를 비추시고/ 상처 난 내 맘 만지시네/ 말씀하시고 회복케 하시네/ 주의 사랑이 다시 살게 하시네     


요한복음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부분에 영감을 받은 것 같았다. 노래를 듣고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내가 꼭 그 벳자타 못 가에서 누군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라면서 38년을 보내고 있는 병자 같이 느껴졌다. 삶은 정확하게 멈추지 않고 흘러갔지만 여전히 내가 아픈 부분들, 힘들어하는 부분들은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은 듯했고 내가 애쓴 만큼의 중량으로 무력감이 느껴졌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주변에서는 ‘아직도 사춘기냐’, ‘대충 흐르는 대로 살아. 다 그렇게 살아.’ ‘인생 뭐 별것 없어. 그냥 결혼하고 애 낳고 평범하게 살면 돼.’ 등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보려’ 안 해본 것도 아니다. 학생 때는 결과야 둘째 치더라도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교에서도 수많은 대내외활동을 하며 스펙을 쌓았다. 토익도 900을 넘기느라 고생했고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꿈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원하는 직업을 위해, 원하는 직장을 위해, 정규직을 위해, 예쁜 가정을 꾸려보기 위해. 찬란한 미래를 위해 ‘지금, 여기’를 포기하는 너무 오랜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 끝에서 어떤 점수도, 직업도, 직장도, 직급도, 사람도, 나를 '평범하게'는 만들어 줄지언정, '건강하게' 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결과는 어느 드라마인가 소설의 첫 문장이 너무 공감 갔다며 또래 친구가 알려준 것처럼 삼십 대의 끝에서도 ‘나는 내가 바라던 그 어느 것도 되지 못했다.’


이 문장을 만나고 쓰고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서 한참을 멈추게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도 꼭, 바로 해야겠다. 내 안에는 이 엄청난 중력을 지닌 무력감을 반전시킬 힘 또한 분명 있다고. 끝과 절망, 어둠이 짙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이미 있다는 것 말이다.

     

신기하게 몇 년 전부터 세종에서 나만의 독립된 시간과 공간을 작게나마 마련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혼자의 시간들, 혹은 신과 단둘의 시간 속에서 더 많이 산책하고, 좀 어설프고 맛없어도 건강한 음식을 스스로에게 해주었다. 책을 통해 나보다 앞서 더욱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쓴 작가들을 만나고, 철학상담,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을 받고, 성찰 모임을 나가면서 나를 만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누군가 보기에는 나의 ‘사춘기스러운’ 고민들이 시대와 세대와 국적을 초월한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좀 더 편안해졌다.

      

그래서 그 고민들을 계속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답게 사는 것.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하나 더, '마냥 기다리는 것'은 멈추기. 어떤 직업이, 직장이, 정규직이,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잘못된 믿음을 포기하는 것. ‘어떤 외부의 것’이 나를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선 ‘내 들것을 들고 걸어갈’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걸어가 보겠다고, 걸어내 보겠다고 결심하는 것. 이게 바로 38년이나 무력하게 그 자리에 머물던 벳자타 못 가의 병자에게 예수님이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말한 이유가 아닐까. 나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이미 있다고 믿는 것. 그 믿음에 희망을 두고 한걸음을 떼어보라는 초대 아닐까.

 

이렇게 보너스로 받게 된 또 한 번의 서른여덟, 서른아홉의 삶을 기록하고 나누어보려 한다. 지금의 고민과 생각들이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겪었던, 겪을, 어른이들에게 작은 힘이 될 수 있길 희망하면서. 몸도 맘도 건강하게! peace be with you!


이스라엘 벳자타 못 가(2019)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요한 5,1-9)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였는데, 물이 출렁거린 다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이는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 사이 어떤 신부님 강의를 통해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시선이 큰 위로가 되어 첨부한다. 벳자타 못 가의 '38년 된 병자'를 38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게으른, 혹은 무기력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그는 오히려 38년 동안 변하지 않는 상황, 낫지 않는 병든 몸을 이끌고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두며 매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발목을 잡는 문제로 여전히 통증을 느끼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는 건 우리가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대의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작지만 분명한 빛, 희망이 비추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믿고, 한 발을 내딛을 용기를 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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