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가을비가 내리고, 새벽미사 가려고 일어날 때 알싸한 기운에 망설여지는 걸 보면 정말 '가을'이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데 이상하게 이번엔 반가움보단 두려움이 올라오는 것 같아.
언제쯤 좀 더 당당하고 담담하게 온전히 나답게 삶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 '나답다'는 게 뭔지부터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을까. 그래도 엊그제 상담을 마치고는 큰 산을 넘은 것 같이 우쭐한 마음이 생겼었는데. 서울집에서 지내면서도 가족 문제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흐름에 집중하며 일주일을 지냈다고 칭찬을 받았거든. 그보다도 난,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당장 완벽히 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시작도 못하게 막진 않겠다고 결심했단 걸 칭찬해주고 싶어. 지금 잘하고 못하고 와는 상관없이, 좋아하는, 사랑했던, 어쩜 애증의 관계였던 일들과 다시, 기꺼이 만나기로 했다는 것. 물론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넘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말이야.
이번 이야기들은 더욱 그런 날들의 네게 보내는 편지가 됐으면 좋겠어. 찰나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 지나고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몫' 앞에 또다시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것 같이 느낄 너에게. 선명했던 순간들은 너무도 쉽게 희미해지고 금세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를 너에게. 빛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자 '지금 여기', 곧 '영원'의 기억들을 다시 정리해보려 해.
긴 피정을 떠나기 전날, 또다시 마음이 무너진 상태로 명동성당을 찾았지. 기도할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미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성모상에 짧은 하소연을 하고 돌아 나오는데 멀리서 성큼 다가오는 그림자. 허름한 차림의 누군가가 너무도 씩씩하게 다가오는 게 느껴져 재빨리 땅바닥으로 시선을 두고 피하려는데 그 씩씩한 발걸음은 내가 피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길을 막아서며 앞에 멈춰 섰지. 다짜고짜 쑥 내민 책 한 권과 함께 던져진 말마디 "여기 다 있어. 젊으니깐 주는 거야."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니 그렇게 이상하게 보거나 놀라지 말고 책이나 잘 읽어보라며 몇 마디 보태고 등장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어떤 신부님이 썼다는 산티아고 순례 책을 얼떨결에 손에 들고 자연스레 발걸음은 다시 성당 안으로 향했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황당하면서도 책 표지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산티아고'라는 글자와 이상한 아줌마의 "여기 다 있다"는 말이 미사 내내 머릿속을 돌아다녔고. 4년 전 봄날, 깁스하고 무모하게 떠났던 40일, 그 이상한 순례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어. 뭐가 다 있다는 걸까.
그렇게 살아난 기억들을 집까지 들고 와 아주 오랜만에 이상한 순례길을 담은 글 몇 개를 차근히 읽어보는데. 이상한 아줌마의 그 이상한 말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 분명 모든 게 명확하게 알아차려진 시간이 있었는데 왜 난 여전히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인 걸까.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생생하던 그 모든 날의 기억은 조금씩 흐릿해졌지만 떼제에서 만난 수녀님 말처럼 '이상한 순례길'의 많은 장면들은 삶의 필요한 순간에 떠오르며 힘이 되어주곤 했던 것 같아. 그치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 속에서 여전히 변한 게 하나 없는 사람처럼 아무 기억도 없는 사람처럼 어둠 속에 있었다는 것도 고백해야겠지.
아무튼, 갑자기 이상한 책 선물과 함께 찾아온 산티아고의 기억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비치는 작은 불빛처럼 느껴졌어.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8일간의 피정이 또 아주 좋은 순례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과 함께. 삶의 무게와 변치 않는 굴레처럼 느껴지는 고통들을 피해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던 마음이 그렇게 또다시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렇게 나에게로, 너에게로 향한 침묵 속에서, 숨어있던 네 존재를 담뿍 만날 수 있어 난 참 좋았어. 그동안 문득문득 순간순간 느껴지던 너를 더 이상 억누르거나 다른 모양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냥 믿어주고 싶은, 오히려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비를 맞으면서도 신나서 자전거 페달을 구르고, 빗방울이 연꽃잎 한가운데로 모여 또르르 떨어지는 걸 구경하면서 철부지 같은 웃음을 짓고, 고양이들을 구경하느라 기꺼이 길을 잃는, 천방지축 열정과다 소녀감성에, 눈물도 웃음도 많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네가 가끔은 부담스럽지만. 그런 너를 외면하지 않고 사회에서 원하는 대로, 부모님이, 주변에서 원하는 대로 어른스럽게, 멋있게, 있어 보이게 바꾸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 믿어주는 것. 오히려 그 모습을 지켜주고 그 모습대로 살아내는 것. 그걸 한 번 해보기로 했어. 그게 아마 널 이 세상에 보낸 신이 있다면, 우주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면, 그가 바라는, 어쩜 그가 이미 해주고 있는 그런 것 일 테니.
믿음은 그런 거라고 하던데?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고 그냥 믿어주는 거라고. 무언가를 잘 해내야, 사랑스러운 짓을 해서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덮어놓고 믿는 것 말야. 덮어놓고 한번 믿어주기로 결심해 보려고. 우선 네 존재를, 그리고 다시 써보기로 한 네 결심을. 또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고, 다시 가다가 멈춰 주저앉게 되더라도 말야. 그럼 다시 일어나 걸어보자고. 지금처럼. 이상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그 길, '모든 게 다 있다'는 그 길 위에서 다시 한번 시작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