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그림일기
벌써 햇수로 4년, 세 번째로 맞는 봄과 여름 사이.
나무에 조그맣게 올라오던 연둣빛 잎들이 조금 더 자라고, 조금 더 진한 색을 띤다.
바람도 시원하고 햇빛은 더 뜨거워졌다.
비록 주말엔 서울, 평일엔 세종,
반반살이를 여전히 하고 있지만
나에게 이곳은 작은 쉼터, 리틀포레스트.
누군가에겐 강제 이주의 장소이고 벗어나고 싶은 곳,
누군가에겐 투쟁, 또 누군가에겐 새 출발을 하는 일터.
나에겐 시기적으로 장소적으로
나를 향해 가는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곳.
집 앞 호수는 이스라엘 순례길에서 만났던 갈릴레아 호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는 길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의 초대 같다.
'율리, 너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나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그런데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서울 집에서
짐을 꾸려 생애 첫 자취방으로 이사오던 전날 밤에는
이상하리만치 잠이 오지 않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미래를 알 수 없고 생활의 터전을 옮기는 건 시간낭비 돈낭비가 아닐까. 하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생각들.
하지만 종종 더 똑똑해 보이는 이런 생각들보다 한 걸음의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초반의 적응기는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콘텐츠보다는 행정업무, 사업운영, 예산,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세탁기 돌리는 법을 몰라 고장 났다며 관리실에 전화를 하고,
전자레인지에 스콘과 종이를 함께 넣고 돌려 불이 붙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에서 전단지를 깔고 식사를 하는 시간들을 거쳐야 했다.
이런 나를 살린 건 1일 1 호수 한 바퀴 산책.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걷고 또 걸었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나를 쏟아내고 울분을 토해내는 시간들.
이 무렵 신기하게도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걸어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피정, 토마스 머튼, 이냐시오, 제임스 마틴의 이야기들과
상담, 성찰모임, 철학상담,
무엇보다도 매일의 말씀들로 허기를 달래면서
새로운 세계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곳 내 작은 방은 리틀포레스트처럼
일과 성공과 사람과
수많은 욕심들 덕분에 아주 분주해진,
그리고 그만큼 허기진 내 마음을 채워주고 품어주었다.
하루빨리 소속을 찾아 정착하고
어느 곳엔가 뿌리를 내리고 싶던 나에게
회사가 아닌, 일이 아닌, 어느 사람이 아닌,
영원한 소속을 찾게 해 준 곳이 되었다.
가랑이를 자꾸 찢어지게 하는 세상의 기준들과
'내가 너를 아끼니까 이런 말을 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 어린 조언들과
'너를 사랑하니까 이런 얘기해 주는 거'라는
부모님의 말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건,
내 안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나의 결핍과 부족을 지적하는
나를 부정하는 많은 소리들을 걷어내고 나니
아주 조그맣게 끊기지 않고 울리고 있었던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넌 나의 소중한 아이다.
넌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다.
나 너 살기를 원한다.
너의 그 부족함은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내가 너의 그 어떤 결핍에도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이다.
나 너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다.
내가 너를 돌보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해야 하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는데 시간이 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빈 공간의 시간들을 '쓸모없는 시간'이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꼭꼭 짚어주어야 하고, 나 자신을 믿어주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동안 조금 더 나다워지고, 조금 더 나를 돌볼 수 있게 되고, 조금 더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숨을 고르고 내 마음속 작은 숲, 리틀 포레스트에 닻을 내리는 시간 동안.
가톨릭 신앙 안에 살아가며 느끼고 성찰한 삶의 이야기들을 그림과 글로 나눠보려 합니다. 구독과 좋아요, 댓글은 힘이 됩니다. 우리 모두의 '이상한 순례길'을 응원하며, 함께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