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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10년만의 빠리, 수난기

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2019년 4월 2일 화요일>
'아무것도 안 하기'까지 계획을 세우는 나에게 이번 여행은, 순례길은 정말 많은 걸 알려주고 있다. 이 다리로 어디까지 어떻게 갈지 모르겠지만... 이끄시는 대로, 그래 한 번 가보자.

그 길은 꽃길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첫날 숙소는 파리 6구에 위치한 3성급 호텔의 꼭대기 구석방이었다. 다소 좁고 망사 커튼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혼자서 하룻밤을 묵기엔 충분히 아늑해 보였다. 문을 열자마자 무거운 짐도 신발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베개가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푹신한 이불... 은? 없었다. 

파리의 오래된 호텔복도와 볼때마다 깜짝 놀라는 내 모습

매트리스를 덮은 얇은 천 한 겹이 전부였다. 프런트에 가서 물어보니 "혼자 온 손님을 위한 작은 방이라서 이불은 따로 제공되지 않아요"란다. "응?;;;;;"... 진짜인지 계속 물어보니 원하면 담요를 챙겨줄 수 있다고 했다. 침낭을 챙겨 오긴 했지만 첫날 파리의 호텔방에서 개시하게 될 줄은 몰랐다. 충격적인 루프트탑, 다락방을 뒤로하고 우선 배를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고 비가 내렸다. 


'미식의 도시 파리에서 뭘 먹을까?'는 사치였다. 빗물이 자꾸 붕대 속으로 스며들어 '맛있는 걸' 찾을 여유가 없었다.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자'는 생각으로 걷고 있는데 쇼윈도에 강아지가 눈에 띈다. 라이터 파는 가게에 전시되어 있는 건지 혼자 앉아 있는 건지 철푸덕 앉아 멍 때리고 있는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쇼윈도의 강아지와 파리에서의 첫끼

좀 더 걷다 보니 작은 바(bar)가 보였다. 테라스 자리에 사람이 꽤 앉아 있어서 '그래도 중간은 가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밖에서 볼 수 있도록 메뉴가 적혀있었지만 프랑스어는 읽을 수 없었고 커피 종류와 파스타가 있는 것 같아 그냥 들어갔다. 


무슨 생선 요리를 추천한다는데 첫끼부터 비릿한 생선을 먹기 싫어 내 맘대로 아이스라테와 파스타를 주문했더니 생전 첨 먹어보는 끔찍한 파스타가 나왔다. 반도 못 먹고 식전 빵으로 나온 벽돌같이 딱딱한 바게트와 미지근한 아이스라테로 대충 배를 채운 뒤 첫 카드결제에 도전했다. 20유로, 한화로 약 2만 5천 원이었다.


이번 여행을 위해서 현지 통화로 환전해서 넣어두면 체크카드처럼 쓸 수 있는 카드를 발급받아 갔는데 이 카드는 비밀번호를 내가 정하는 게 아니고 은행에서 발급해준다. 그래서(?!) 비밀번호를 계속 틀렸더니 분위기가 어색하게 돌아갔다. 가까스로 승인이 떨어져 '이 카드가 내 카드다'를 증명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미사가 한창이던 '기적의 메달 성당'

이불 없는 침대에 밥도 맛없게 먹고 마지막엔 카드 도둑으로 몰릴 뻔 하니 마음은 더욱더 너덜너덜했다.


원래 계획은 숙소에 짐을 두고 에펠탑으로 가서 브런치를 먹고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몽마르뜨에 갔다가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한 바퀴 돌고 밤에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에펠탑을 한 번 더 보는 것이었다. 


멀쩡한 다리로도 무리한 계획인데 당연히 에펠탑부터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숙소로 돌아가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 구글 지도를 켰더니 바로 근처에 '기적의 메달 성당'이라는 곳이 있었다. 가서 기도나 해야겠다고, 아니 가서 좀 따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성당으로 향했다. 


@파리 기적의 메달 성당

집시와 소매치기들이 많기로 악명 높은 파리, 잔뜩 얼어 있었는데 성당 주변에는 특히나 구걸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낮인데도 괜히 무서웠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미사가 시작되는 듯한 분위기에 서둘러 성전으로 쏙 들어갔다. 평일 낮이었는데도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자리가 가득 차 있었다.  


성수를 찍고 성호경을 그으니 바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맨 뒤쪽의 큰 기둥에 기대어 섰다. 어디서든 튀는 내 초록색 깁스를 보더니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흑인 할머니가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불어인 "merci"를 반복하며 자리에 앉았더니 또 눈물이 흐른다. 식당에서 성당까지 고작 2-300m 정도 걸었는데도 발이 아팠다. 엉망이었다. 


'여기서 제가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기도인지 뭔지도 모를 말들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점점 꺼이꺼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기 시작했다. 미사가 끝나고 한참을 기도하며 머물다 보니 진정이 좀 됐다. 

'기적의 메달 성당'엔 가타리나 라부레(Sancta Catharina Laboure) 성녀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1930년 당시 수련 수녀였던 가타리나는 7월부터 세 차례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다. 성모님은 카타리나 수녀에게 특정한 모양으로 메달을 만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한다. 이후 1932년 2월, 파리에 콜레라가 발생해 2만여 명의 사상자가 났을 때, 수녀님은 성모님이 말씀해주신 모양으로 2천 개의 메달을 만들어 배포했는데 이 메달을 가진 사람들은 무사했다고 한다. 이를 경험한 파리 시민들은 그 메달을 '기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월의 파리 시내, 흐리고 벚꽃 내림

마음이 안정되고 나니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문을 닫아 놓을 때가 많은 유럽 성당에서 우연히 들렀는데도 미사 시간에 딱 맞출 수 있었다는 점, 몸이 불편해 보이는 나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양보해준 사람들, 미소들이 마음에 남았다. 


"그래 신기하고 감사해. 이렇게 가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성당을 나섰다. 여전히 비가 내렸지만 핑크색 벚꽃이 함께 내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아니 유일한 미션! 에펠탑을 보기 위해 몽파르나스 타워로 향했다.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본 에펠탑과 파리 전경

가는 길에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몽파르나스 타워(Tour Montparnasse)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다 되었다. 발로 직접 걸어가지 못했던 파리 곳곳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꼭 일몰시간을 확인하고 가세요;

그리곤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10년 전 유럽여행에서 봤던 반짝이는 레이저를 뿜어내는 에펠탑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래도 비 오는 파리에서 에펠탑을 가장 편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의 에펠탑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하나둘 늘어갔다. 내일 오전에 일찍 출발해야 해서 얼른 보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밤 9시가 다 돼서야 해가 지고 에펠탑에 불이 들어왔다. 


불 켜진 에펠탑과 파리 야경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반짝반짝 거리는 레이저 뿜뿜?! 에펠탑은 볼 수 없었다. 포기하고 내려와 숙소로 향하는데 멀리서 보였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에펠탑이! 

 

멀리 보이나요?! 표지판들 사이로 반짝이는 에펠탑?!

이렇게라도 본 것에 감사하며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아직 펴고 접는데 익숙하지 않은 침낭 대신 내일 입을 옷을 다 입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4월 초, 비 내리는 파리의 밤은 무척이나 쌀쌀했다. 


"안녕, 파리"

다음날 오전 7시 52분,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출발하는 테제베(TGV)를 타고 프랑스 서남부 '바욘(Bayonne)'으로 가야 했다. 7시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숙소를 나섰다. 역까지는 도보로 10분 정도 걸린다고 구글맵이 알려준다. 역시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비가 내린다. 겉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열심히 걷는데 역은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시계는 벌써 7시 40분, 출발까지 12분이 남았다. 쩔뚝거리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다친 발을 생각 못 하고 너무 촉박하게 나온 탓이었다. 마지막까지 파리는 나에게 쉽지 않았다.   


보통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파리로 들어갈 경우, 바욘을 거쳐 '생장 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라는 곳으로 가서 걷기 시작한다. 나도 비행기만큼이나 가격 변동이 심한 테제베는 물론, 바욘에서의 1박까지는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유일하게 다음 행선지를 알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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