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비 내리는 파리의 아침을 가르며 초록색 반깁스를 하고 10kg의 짐을 메고 뛰다시피 해서 겨우겨우 몽파르나스역에 도착했다. 파리 몽파르나스역은 기차, 지하철, 테제베가 모두 이어져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역 같이 큰 역이었다. 출근시간이 겹쳐서인지 역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욘으로 가는 테제베 출발 5분 전, 역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너무 넓고 플랫폼도 많아 어디가 어딘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바쁜 파리지앵들에게 "excuse me?!" "do you speak English?!"라고 말을 걸면 경멸하는 눈빛과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도망갔다. 파리에서 소매치기들이 접근할 때 자주 쓰는 수법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발에는 깁스를 하고 아빠에게 빌려 입은 어벙벙한 등산복을 위아래로 입고 배낭은 제 몸만 한 걸 메고 눈은 퀭해서 말을 걸면 누구든 대답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우왕좌왕하면서 느낌에 따라 무작정 계단을 올랐더니 열차들이 보이고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다. 직감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표를 내밀었다. 그러자 오른쪽에 보이는 열차를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뭐라 뭐라 하는데 '지금 출발하니 빨리 타라'는 것 같았다. 기차는 이미 앞쪽부터 하나씩 문을 닫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떠날 기세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차에 몸을 던지다시피 하며 뛰어올랐다.
무사히 탔다는 안도감과 함께 또다시 멍해졌다. 자리를 찾아갈 힘도 없어 식당 칸에 녹초가 되어 앉아있는데 승무원들이 표를 검사하며 지나간다. 내 표를 보더니 "지금 여기는 1등석이야. 2등석은 식당칸 뒤쪽으로 있는데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서 다시 뒤쪽 칸으로 타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다음 역을 기다리며 창밖을 다시 멍하니 쳐다봤다.
기차는 1시간 반 정도를 달리고나서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역에서 정차했다.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멍청이 짓을 해버렸다. 타고 온 열차의 뒷칸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휩쓸려 나도 모르게 건너편으로 가서 줄을 선 것이다. 기차를 타려는 줄이 점점 줄고 내가 올라탈 순서가 됐을 때가 돼서야 문 옆에 있던 '파리행'이라는 사인을 봤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또다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내 표를 보여주니 건너편 기차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열차는 문을 하나씩 닫으며 출발하기 직전, 나는 또다시 쩔뚝거리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뛰기 시작했고 출발하려는 열차에 몸을 던져 넣었다.
열차는 출발했고 내 멘탈은 출가했다. 멍하니 표를 들고 서 있는데 승무원 무리가 지나간다. 다시 한번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아 표를 보여주며 "이 기차가 바욘 가는 거 맞죠?"라고 물었더니 그중 한 사람이 "아니 이거 파리 가는 건데?! 잘못 탔어"라고 말한다.
"응?!" 사색이 되어 "진짜? 바욘으로 가야 하는데 어떡해"라고 했더니 "다음 역에서 다른 기차로 갈아타"란다. 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just kidding~ joke joke(농담이야)"라며 웃어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미안하다며 그는 "맞게 탔고 앞쪽으로 가면 자리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내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그제야 배고픔이 느껴졌다. 간단히 샌드위치와 커피로 위를 달래고 창밖을 보며 집 나간 정신을 되찾는 시간을 가졌다. 파리에서 TGV로 4시간 정도가 걸려 정오가 되어서야 바욘(Bayonne) 역에 도착했다.
바욘은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출발점인 '생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까지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있다. 순례자들은 보통 생장부터 출발하면 첫날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걷기 전, 바욘이나 생장에서 1박을 하며 잠시 쉬어간다.
나도 '쉬어감'이 필요하긴 했지만 언제까지 쉬어야 피레네를 넘을 수 있을지는 도통 감이 안 잡혔다. 그것보다 아침부터 이동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도 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니 어디든 그냥 빨리 눕고 싶었다.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역 앞에 문이 닫혀있는 작은 예배당을 지나 예약해둔 숙소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파리 숙소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어서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갔지만 직원들도 친절하고 방도 쾌적했다. 창문을 열면 바로 큰 강이 보였고 무엇보다 파리 숙소엔 없던 '이불'이 '있었다.'
짐을 던져두다시피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부터 이 푹신한 침대에 눕기까지의 시간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휴...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구나' 눈물이 또 핑 돌았다. 항상 발의 통증은 긴장이 풀릴 때 심하게 느껴졌다. 발이 푹푹 쑤셨다.
비는 또 왜 이렇게 오는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었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붕대 속으로 들어가니까 외출하는 게 아무래도 꺼려지는데 4월의 프랑스는 어딜 가나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침대에 누워 일기예보를 검색하고나서 더 우울해졌다. '일주일 내내 비'
이제 진짜 고민도 시작해야 했다. '내일은 어디로 가지?'
나도 다른 순례자들처럼 원래는 바욘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일찍 '생장 순례자 사무실'을 들러 걷기 시작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말 바욘 이후부터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한 달 후에 독일 친구네를 잠시 들러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서 자야 할지 백지상태였다.
'그냥 한국 갈까?'라는 마음부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여기 머물러야 하나?'까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7월 25일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끝에 있는 '성 야고보 사도'의 축일이다.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분으로 어부였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했다.
그의 제자들은 시신을 수습해 돌로 만든 배에 실어 생전에 야고보 사도가 말씀을 전파했던 스페인 쪽으로 흘러 보냈는데 이 배에는 노와 돛, 선원조차 없었다고 전해진다. 오직 수많은 조가비들만 붙어서 함께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조개 모양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표식이 되었다.
야고보 성인의 유해는 제자들에 의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안에 모셔졌는데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향해 걷는다. 특히 성인의 축일에 콤포스텔라 성당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맞춰 걷는 순례자들이 많다.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이곳까지 오는 모든 길을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하며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프랑스길 800km는 길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