깁스하고 떠난 40일간의 산티아고 순례
'월요일 오전',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공항에 겨우 가서 저녁 비행기로 상해를 경유, 다시 10시간 넘는 비행 끝에 프랑스시간으로 '화요일 새벽' 파리에 도착, 시차 적응할 겨를도 없이 꽉 찬 하루를 보낸 후, '수요일 오전' 다시 짐을 꾸려 테제베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바욘에 도착하기까지, 3일 동안 세 나라와 네 도시를 거쳤다.
드디어 첨으로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다음 계획은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또다시 어딘가로 짐을 들고 이동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시 한국에 돌아가는 것도 에너지가 있어야지... 우선은 하루만 더 있어보자.' 현재의 숙소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머릿속으로 결정만 했는데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프랑스 남서부 아두르강(Adour R.)과 니브강(Nive R.)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바욘(Bayonne)은 이베리아 반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고대 로마시대부터 번영을 누렸다. 1199년부터 1451년까지는 영국령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바스크(Basque) 문화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현재는 인구 4만여 명에 포도주, 브랜디, 햄, 초콜릿 등의 식품과 신발, 철강, 화학공업이 주를 이룬다. 프랑스 3대 휴양지 '비아리츠'와도 인접해 있어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누워 있다 보니 오후 4시가 훌쩍 넘었다.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배고픔이 느껴졌다. 오늘 먹은 유일한 음식은 아침 겸 점심으로 테제베 안에서 허겁지겁 먹어치웠던 샌드위치 뿐이었다. 배도 채우고 동네 구경도 좀 할 겸 작은 크로스백만 들고 방을 나섰다.
나오는 길에 프런트에 들러 하루 더 묵고 싶다고 말했더니 평일이라 여유가 있다며 방도 옮기지 않고 지금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했다. 처음으로 이동할 걱정이 없는 날이 되었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을 탑재하니 흐린 하늘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까 지나왔던 작은 성당을 들렀다. 'Saint-Esprit(성령) 성당'이었다. 바욘의 문화유산이라는 표지가 붙어있었다. 조금씩 개보수되고 있었지만 수세기 전의 건축물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이 참 프랑스다웠다.
들어가 내부를 한 바퀴 천천히 둘러봤다. 십자가가 중앙이 아닌 오른쪽 한편에 위치해 있었고 이 성당의 수호성인으로 보이는 'St. Erene(이레네 성인)'이 모셔져 있었다. 뒤쪽 2층에는 파이프 오르간도 보였다. 맨 뒤쪽 의자에 잠시 앉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네요. 감사합니다.' 한국을 떠나 처음 느껴 본 평온함이었다.
Saint-Esprit 성당에서 한참 앉아있다가 밖으로 나와 먹을 곳을 찾았지만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견딜만했다. 우선 바욘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바욘 대성당(Bayonne Cathedral)'으로 향했다.
바욘 어디서나 보이는 뾰족한 두 개의 첨탑만 따라가면 쉽게 대성당에 이를 수 있는데 내가 있던 'Saint-Esprit(셍떼스쁘히)성당'에서는 성당과 이름이 동일한 'Pont Saint-Esprit (셍떼스쁘히 다리)'를 건너야 했다. 아두르강과 니브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거친 비바람 속에 걸어가는데도 풍경이 아름다웠다.
다리를 건너면 회전목마가 있는 작은 광장이 나온다. 뒤편으로는 시청 건물이 보이고 오른쪽 끝에는 작은 요새처럼 망루가 멀리 보였다. 프랑스 라비거리 추기경(Le Cardinal Lavigerie) 동상도 바욘을 지키듯 서있다.
바욘의 거리들은 좁은 골목들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알록달록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다리를 건너 그랜드 바욘(Grand Bayonne) 지역부터는 옛 유럽의 돌바닥 길이 이어지며 바스크 문화의 멋스러움이 더해진다. 교회 첨탑을 향해 골목길을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거대한 바욘 대성당이 한눈에 꽉 차게 들어온다.
보통 '바욘 대성당'으로 불리는 Bayonne Cathedral은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은 중세의 건축물이다. 높은 첨탑과 넓고 아름답게 꾸며진 회랑을 갖춘 현재의 모습을 완성하는 데는 6세기가 넘게 걸렸다고한다. 1998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에 포함되어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성당 내부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내가 들어왔던 맨 뒤편에 섰다. 문득 왼쪽에 작은 나무 책상과 그 위의 순례자 표식인 조가비들이 눈에 띄었다. 그때 중년 여성과 봉사자로 보이는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며 책상으로 다가왔다. 불어라는 것 외에 내용은 알 수가 없었지만 '순례자 여권'을 한 뭉치 주고받으며 서류를 작성하는 걸로 봐서는 여기서도 '순례자 여권'을 발급하는 것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크레덴시알(Credencial)'이라는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아 걷는다. 이 여권이 있어야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묵을 수 있고 각 마을의 주요 스폿에서 여권에 스탬프를 받아 최종 목적지인 콤포스텔라 성당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길을 증명하고 완주증서를 받을 수 있다.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보통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발급받거나 국내에서 발급받아 가기도 한다. 이외에도 순례길 곳곳에 발급해주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욘 대성당에서도 발급이 가능하다.
나도 모르게 다가가 물어봤다. "혹시 여기서도 순례자 여권을 발급해주나요?" 둘은 얘기를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그럼요~ 우선 앉아봐요~ 울랄라~ 발은 왜 그래요? 순례길 가는 거 맞아요?!" 봉사자 할머니는 영어를 잘 못하셔서 여권을 발급받아가던 중년 아주머니가 통역사가 되었고 '이상한 순례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두 천사들은 내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고 나는 어느새 출국하는 날 깁스를 하고, 파리에서 기차를 놓칠 뻔했던 일들, 어쩌다 다치게 됐는지, 퇴사 후 순례길을 계획하게 된 이야기까지 술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2-30분 동안 우리는 울고 웃으며 국적과 나이와 언어를 초월해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길에 진심으로 축복을 빌며 볼뽀뽀까지 하고 헤어졌다.
원래 1유로인가를 기부금으로 형식으로 내고 살 수 있는 순례자 표식 조개껍데기도 그냥 가져가라며 손에 들려주셨다. 극구 사양했지만 봉사자 할머니는 친정엄마가 반찬을 챙겨주듯 가방에 막 찔러넣어주셨다. 조가비와 함께 바욘 성당 도장이 찍힌 순례자 여권을 받아 들고 성당을 나섰다. 비는 그쳐있었다.
'그랜드 바욘'을 뒤로하고 다시 'Saint-Esprit(셍떼스쁘히) 다리' 앞까지 내려왔는데 눈앞에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완벽한 호를 이루며 '거대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태어나서 이렇게 가깝고 크게, 완전한 모양의 무지개를 본 건 처음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계약의 표징처럼 뭔가 좋은 일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흐리고 먹구름이 낄 때가 오겠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하늘 도화지에 그려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애써봐도 사진에는 눈으로 보이는 것만큼 선명하게 담기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한참 동안 바라보며 눈과 마음에 새겼다.
이렇게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드디어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이 40일간의 '이상한 순례길'을 잘 마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다 감사했다.
깨똑> "언니~ 잘 도착했어요?!~ 초반에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파이팅이에요! 부엔 까미노"
Re> "아니... 다리에 반깁스 했어. 얼떨결에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Re> Re> "헐... 언니..."
산티아고를 먼저 걸었던 선배 순례자가 안부 연락을 해왔다.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내 순례길에 대해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일주일 정도 루르드라는 곳에 가 쉬면서 다리 상태를 보고 한국으로 돌아오든 다른 방법을 찾든 해보자'라고 했다. 루르드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성지라는 말도 덧붙였다.
루르드는 산티아고를 계획했을 때 많은 이들이 들러보라고 권했던 곳이지만 빡빡한 프랑스길 완주 일정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아 루트에서 제외했었다. 이제 완주는커녕 시작도 못하고 갈 데도 없으니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루르드로 가는 길과 한국인 수녀님께 도움을 요청해보라며 메일주소까지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