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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Oct 19. 2016

아버지의 텅 빈 시간

가족과 여행을 계획한다. 속마음은 벌써 피로감이 밀려온다. 누가 휴가를 떠나는 것이라고 했나.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빈 시간이 그립다. 


writer 권영민 / illustrator 곽명주 



아버지의 시간은 언제였을까?

둘째 때문에 요즘 잠을 잘 못 자고 있다. 아이를 보러 오신 어머니께 아이들은 왜 밤중에도 3시간마다 일어나서 먹으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어머니가 나를 키우시던 시절, 아침이면 밤사이 나온 기저귀를 빨아 말리는 일이 큰 일과였는데, 세탁기가 없으니 직접 손으로 빨아야 했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없었다면 절대로 그 일을  전부 해내지 못했을 거라고 하셨다. 

저녁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아직 갓난아이였던 나를 목욕시켰고, 어머니를 대신해 낮 동안에 나온 기저귀를 빠셨다. 새벽에도 아이가 깨면 둘째를 임신 중이던 어머니가 깨지 않도록 먼저 일어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서 먹였다고 하셨다. 밤에는 아이 기저귀를 갈고, 낮에는 돈을 벌던 그때, 아버지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아버지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셨지만 언제나 같은 시간에 출근하셨고, 비슷한 시간대에 퇴근을 하셨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셨고, 별다른 취미도 없으셨다. 그 당시 아버지들의  흔한 취미였던  낚시도 하지 않으셨고, 볼링도, 골프도, 테니스도 어떤 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퇴근 후 거의 언제나 나와 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다. 아버지에게 차가 생긴 이후로는 주말마다 캠핑을 갔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아버지는 ‘일을 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돌봐주시는 아버지’밖에 없다. 


아버지의 시간은 언제였을까? 젊은 아빠였던 아버지는 언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셨을까? 아버지는 사우나를 갈 때도 언제나 나를 데려가셨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공장에는 늘 사람이 북적댔고, 주말이면 나와 동생이 엉겨 붙어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이제 아버지가 나를 낳은 때에 비하면 훨씬 많은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우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일이 성가시고, 목욕시키는 일은 서툴고, 기저귀 빨래는커녕 기저귀를 마트에서 사 오는 일도 귀찮다. 주말이면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고 싶고, 휴가 때면 나 혼자만 집에 남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쉬고만 싶다.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아버지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에 허먼 멜빌이 쓴 <필경사 바틀비>(1853)를 읽으면서다. 

<필경사 바틀비>는 월스트리트에서 개업한 변호사의 눈에 비친 한 인물의 기이한 언행을 담은 단편소설이다. 바틀비는 차분한 성격으로 엄청난 양의 업무도 잘 처리하는 꽤 능력 있는 필경사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바틀비는 변호사가 맡기는 일을 하나씩 하나씩 거절하더니 나중에는 그가 시키는 모든 일을 거절해버린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바틀비는 모든 것을 거절한다. 다른 일을 제안해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며 거절하고, 식사에 초대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며 또 거절한다. 바틀비는 결국 방랑죄로 감옥까지 가게 된다. 변호사가 간수에게 뇌물을 줘 좋은 음식을 제공해주려고 했지만 이 역시 바틀비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며 음식을 거부하고 결국 굶어죽고 만다. 바틀비는 우리에게 주어진 온갖 책임과 역할에서 벗어난 존재, 모든 것을 그만두고 거절하고 싶은 나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아버지께 여쭸다.  


“아버지께서는 언제 남편과 아빠, 사장으로서의 책임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셨어요? 
모든 것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셨어요?” 

아버지도 모든 것을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때가 있다고 하셨다. 주말이면 좀 더 자고 싶었고, 휴가를 가서 노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도 하셨다.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했다. 바로 혼자 운전할 때가 아버지만의 시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첫 차로 포니 왜건을 구입하고 혼자 운전해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모든 생각에서 놓여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셨다. 아버지에게 운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 그래서 나 자신에게만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 말씀의 뜻을 알 것도 같았다. 나 역시도 직접 운전을 해 혼자서 먼 지방에 가는 때면 문득 예상치 못한 눈물이 솟구칠 때가 있었다. 슬프거나 괴로워서는 아니다. 그저 아빠도 아닌, 남편도 아닌, 누구의 아들이거나 누구의 동료도, 누구의 선배도 아닌 ‘나’라는 존재와 문득 대면했기 때문이리라. 아마 아버지 역시 포니 왜건에서 꽤나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텅 빈 시간, 멍한 시간, 버케이션 

휴가 vacation라는 말은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라틴어 ‘vacatio’에서 온 것인데, 이 말은 단지 노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워진 상태는 노동을 포함한 모든 것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에 ‘vacant’나 ‘vacancy’와 같은 말의 의미에 비어 있음, 생각 없이 멍한 상태라는 뜻도 담기게 된 것이다. 

즉 휴가 休暇는 단지 일을 하지 않는 상태인 휴무 休務와는 다르다.  바틀비가 그렇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은 것(I would not prefer to)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I would prefer not to)한다는 말로 모든 것을 거절한 것은 그가 진정한 의미의 절대적 자유, ‘휴가’를 추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아버지께서 일을 잠시 쉬고 어린 우리와 함께 계곡에서 놀던 때는 휴가라기보다 아마 휴무였을 것이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운전하던 때야말로 아버지의 시간, 아버지의 휴가였다. 

아빠의 휴가만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나는 휴가를 가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아버지가 하실 수 있었던 말은 아마 “나는 너무 멀리 가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정도였을 것이다.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으신 아버지께 나는 전화하는 것조차도 너무 인색하다.


또다시 휴가철이 왔다 갔고, 새로운 휴가가 오고 있다. 이번 휴가만큼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둘째가 태어나 출산‘휴가’를 보내고 있는 아이 엄마가 조용하고 텅 빈 상태로 멍하게 있도록 나는 여태 단 한 번도 내버려둔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아내의 시간은 언제일까? 내 아내는 언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아내의 시간은 남편인 내가, 나의 시간은 아내가, 아버지의 시간은 아들이 서로의 시간을 상상하면서 만들어줄 때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출산휴가가 끝나기 전에 함께 여행을 하거나 쇼핑을 하는 것 대신 아내가 깊은 심심함에 빠지도록 텅 빈 시간과 장소를 선물해주리라. 아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고 하기 전에 말이다. 그때는 아마 나도 휴무 대신 텅 빈 ‘휴가’를 허락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쓴 권영민은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공동체인 ‘철학본색’을 운영하며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숙원하던 음악 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른 아내를 대신해 아들 선재를 키워낸 값진 경험을 육아일기로 기록했다. 그 기록을 엮어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6년 터울로 태어난 둘째 선율이 덕분에 다시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아이 둘이 함께하는 완전한 삶을 만들어보겠다고 매일 다짐한다. 



* 비어있는 시간의 가치를 아는 아버지들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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