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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드저널 Oct 04. 2016

야구 때문에, 야구 덕분으로

할아버지가 좋아서 함께 야구를 보았고, 아버지에게 야구를 배웠다. 시인보다 야구광으로 더 잘 알려진 서효인. 그는 막 걸음마를 뗀 딸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보며 여전히 야구 글러브를 떠올린다.


written by Hyoin Seo / illustrated by Eunhyun Bak 



아들을 낳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유

아버지가 되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캐치볼을 하고 싶었다. 해가 긴 여름날 학교가 파한 아이와 칼 같이 퇴근한 내가 각자 글러브를 끼고 서로의 가슴팍 쪽으로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는 볼을 주고받으면서, 가끔은 이상한 쪽으로 공을 던지고 그것을 투덜거리며 공을 주우러 가면서, 부드럽게 해가 지는 골목에서 나누는 캐치볼. 아들을 낳고 싶은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이런 캐치볼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지금은 딸 둘의 아버지가 되었고, 녀석들이 아들보다는 공을 잡거나 던지는 것을 싫어할 수는 있겠다, 생각하고는 있다. 그러나 딸이라고 캐치볼을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아이들만 원한다면 나는 녀석들과 나의 글러브를 언제나 챙길 것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보며 나는 야구 글러브를 떠올린다.


캐치볼도 좋지만 직접 야구장에 가는 것은 더 좋겠다. 엄마가 못 먹게 하는 군것질거리도 마음껏 즐기고 악도 지르고 조금은 흐트러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다. 흥성흥성한 야구장 분위기에 취해 그날 하루는 승패에 상관없이 심장이 쿵쾅대면 더 좋겠다. 야구장 펜스 너머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같이 바라보는 일은 아주 근사하겠다. 경쾌한 타구음에 아이들과 함께 시선을 빠르게 움직이면 멋지겠다. 그 안타가 우리가 응원하는 팀의 역전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야구만큼 아이와 아빠가 함께 즐기기에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야구가 좋다. 내 아이도 야구를 좋아하면 좋으련만.



야구보다 할아버지가 좋았다

나에게 야구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할아버지다. 그 시절 평범한 노동자였던 할아버지는 글러브를 끼고 야구공을 잡는다거나, 야구장 입장권을 끊고 1루 관중석 어디쯤에 앉아 응원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일을 쉬는 날이면, 그날이 일요일이면 그날따라 오후에 하는 야구 중계를 누워서 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야구보다는 할아버지가 좋아서 할아버지의 불뚝한 배에 기대 함께 야구를 보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당시 해태를 응원했고, 그때 그 팀은 이기는 경기가 많았다. 멋진 선수들이 치고 달리고 던지는 모습을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야구 용어나 규칙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냥 나와 함께 야구를 보았다. 저런 것이 있구나, 야구라는 것이 있어. 그때는 이렇게까지 야구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서 야구도 좋았다.


할아버지와는 단 한 번 야구장에 갔다. 아버지가 조금 더 다정하거나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면 한 번보다는 많이 갔겠지만, 딱 한 번이라는 것도 되돌아 추억하기엔 꽤나 괜찮은 구석이 있다. 야구장에서 할아버지는 의외로 조용했다. 지금은 낡고 낡아서 프로야구는 더 이상 치르지 않는 야구장이지만, 그곳이 사람들과 조명탑과 전광판 같은 스펙터클에 할아버지는 약간 놀란 것도 같다. 반대로 어린 나는 그 휘황찬란함이 좋아서 어리고 유연한 몸으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응원단장의 몸짓을 따라하거나 응원구호를 악을 지르며 복창했다. 

그때도 할아버지는 야구에 대해 뭔가 가르쳐 주진 않았다. 할아버지는 야구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문맹이었으면서도 전광판의 모든 기호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고, 선수의 동작을 보고 이름과 포지션을 알아챘다. 그날 야구는 역시나 이겼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8회 즈음에 자리를 뜨자고 했건만 우리 가족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1루 관중석에 있었다. 경기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할아버지는 과묵했고, 지금껏 나는 그것이 진정한 야구팬의 관전 태도라고 믿는다.



할아버지는 야구 용어나 규칙을 설명하진 않았다. 그냥 나와 함께 야구를 보았다. 저런 것이 있구나, 야구라는 것이 있어. 그때는 이렇게까지 야구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서 야구도 좋았다.


아버지에게 야구를 배웠다

야구를 본격적으로 가르쳐 준 사람은 물론 아버지다. 아버지는 어린 나와 둘이서 야구장에 자주 갔다. 거기서 나는 야구 기록과 규칙 등을 배웠다. 라인드라이브, 더블아웃, 더블스틸, 태그아웃과 포스아웃 같은 용어를 다른 친구보다 먼저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선수들의 플레이가 있을 때에는 무언가 알려주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플레이가 멈춰 있을 때 방금 지나온 상황에 대한 해석을 곁들였다. 야구 캐스터나 해설가가 되지 못한 한을 아들에게 풀 듯, 아버지는 갑자기 달변이 되었다. 나는 초등학생 주제에 야구에 대한 꽤나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훗날 알고 보니 조금씩 틀리거나 부정확한 것도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꼬마 야구 해설자가 되어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 일쑤였다.


확실히 야구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게 보이고 그 재미가 더 커졌다. 야구계의 오래된 격언인 “야구 몰라요”라는 말처럼 야구는 규칙과 기록, 선수와 플레이 모두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나타나며 그것들의 조합으로 또 다시 새로운 얼굴을 하고는 한다.

아버지는 스포츠 신문의 기록지를 끼고 살았으며 매일 밤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보고는 했다. 인터넷도 매일 중계도 없던 시절의 아버지의 겸허한 탐구욕은 지금까지도 나를 자극시킨다. 야구는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다. 그래서 그 재미도 끝이 없는 것이다.



딸아! 이 모든 게 야구 때문이다 

아이들과 캐치볼 전에 야구장에 먼저 가는 것이 계획이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지만 요즘엔 남자보다 더 근사한 자세와 해박한 지식으로 야구를 즐기는 여성이 많아졌다. 우리 딸도 그중 하나가 되어 매일 저녁 설레어 하고 매일 밤 좌절하거나 기뻐하겠지. 야구 때문에 괴로워할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미안해지는 마음이지만(어쩐지 기아 팬으로 키울 작정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대로 묻어 두겠다. 나 역시 야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는다.


야구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혹은 중요한 경기의 중계를 보면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야구를 잘 설명해 주는 아빠가 되어야겠다, 다짐한다. 세 시간 넘게 하는 걸 아이들이 처음부터 좋아할 리가 없으니 군것질거리도 제공하고, 오고가는 길에 맛있는 밥도 먹어야겠다. 

아니, 왠지 이 모든 게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고, 결국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야구를 사랑해서 잡는 계획인 것만 같지만, 엄연히 취미와 놀이는 이런 식으로 사후 유전자가 영향일 끼치는 법이다. 이 모든 이기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딸들과 애착 관계를 잘 형성해야 하겠다. 

삶의 거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 야구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이겠지? 사실이 그런 거라면, 미안하다. 그러나, 그래도, 그리하여,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이 글을 쓴 서효인은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한 시인이고, 편집자이며 두 아이의 아빠다. 두 권의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과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를 썼다. 스물한 번째 염색체가 하나 더 많은 특별한 딸 은재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잘 왔어 우리딸>을 펴내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아이를 키우는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 좋은 건 아이와 나누고 싶은 아버지들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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