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우연히 제목에 탁 꽂힌 책이 있었습니다. [타이베이, 도쿄, 파리에서 나를 유혹한 가게들]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작가가 도시에 머물며 가보았던 가게들을 직접 그림으로 그리고 가게에서의 추억과 느낌들을 가볍게 적은 책이었어요. 몇 장 읽으니 순간 머릿속에 글감이 스쳐 지나갑니다.
다음 브런치북 주제는 베트남 여행 준비로 정해두었는데, 아직 제주도에 대해 쓸 것들이 더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대체 뭐로 써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였거든요.
"좋아, 이번에도 한 번 주워 먹어 보자. 이 책에서 제목만 제주로 바꾸면 되겠군."
저는 매년 아이들과 여름과 겨울 약 2주 정도 제주도에서 머물다가 옵니다. 그렇게 지낸 지 4년 정도 되었고요.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분들이나 제주도에서 오랜 기간 여행을 하신 분들께는 제 글들이 "나 제주에 대해 이만큼 알아!" 하는 자만심으로 비추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고작 몇 번 가봤다고 아는 척하고 내 경험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저의 추억을 되새겨보고, 그 추억을 단순히 글로 정리해 보는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주시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독자도 몇 명 없는데 별 걱정을 다합니다.)
오늘 소개할 가게 세 곳은 저희 가족이 매번 제주도에 갈 때마다 꼭 들르는 곳입니다. 같은 가게를 한 두 번 가게 되는 건 '맛있기' 때문이지만, 매번 간다는 건 이제 맛 그 이상의 만족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제주에 대한 추억'이 있기에 그 추억을 맛보러 꼭 들르게 되는 것 같아요. 제주도에 우리만의 맛집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참 설레고 행복한 일입니다.
# 웅스키친
우리 가족의 최애식당입니다. 지도를 찍고 가면 평범하지만 오래된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저층 아파트와 빌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이런 곳에 이태리 레스토랑이 있다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겉에서 보는 식당의 모습도 전혀 이태리식당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단정하고 세련된 느낌의 인테리어가 물씬 풍기는, 밖에서 보던 것과 정말 새로운 느낌의 공간이 펼쳐집니다. 오픈레스토랑이라서 요리하는 모습이 다 보이는데도 아주 깔끔하고 정돈된 분위기입니다.
함박스테이크와 파스타가 주 메뉴인데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맛입니다. 무엇보다 신선한 재료로 깨끗하게, 정성을 다해 요리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주에 갈 때마다 매번 가니 전 메뉴를 다 먹어보았는데 단 한 번도 실망한 적 없이 저희 가족에게는 맛, 분위기, 가격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운 식당입니다.
# 달치즈
세화에 위치한 달치즈라는 카페 겸 식당입니다. 겉에서 보면 제주의 오래된 초가집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막걸리가 어울리는 주막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다들 그렇게 느끼는 건지 입구에는 '막걸리는 없어요'라는 센스 있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메뉴는 이런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빵과 치즈가 메인입니다. 들어가 보면 요즘 느낌의 감성 카페와는 완전 거리가 먼 다소 클래식하고 오래된 느낌이 카페입니다. 내부는 좁고 산만한 느낌도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갈 때마다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먹습니다. 훨씬 여유롭고 분위기도 색다릅니다. 밖에서 먹는다고 별다른 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저 제주의 작은 마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됩니다.
치아바타나 바게트처럼밍밍한 식사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쫀득하고 고소한 빵 맛에 반할 거예요. 곁들여먹는 카이막과 꿀은 빵의 맛을 극대화시켜 줍니다. 저뿐 아니라 아이들도 너무 맛있게 잘 먹고요. 저희 집 근처에는 이런 맛있는 빵과 카이막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인지 아이들은 제주만 가면 카이막 빵을 먹으러 가자고 합니다.
# 돌담너머 당근
제주 구좌는 당근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구좌의 웬만한 카페는 당근케이크, 당근 주스를 거의 다 팔고 있고 그 맛도 비슷비슷 대부분 맛있습니다. 이곳 역시 사장님이 직접 만드시는 당근 케이크, 당근 빵 물론 맛있습니다. 케이크이나 커피도 다른 카페에 비해 저렴하고요. 사실 처음 이곳에 가게 된 이유도 너무 잘 먹는 아이들 때문에 음료나 케이크가격이 부담스러워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가게 되었어요.
카페는 작지만 세련되고 깔끔한 인테리어로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창문밖으로 탁 트인 잔디밭은 카페를 답답해하는 아이들에게 잠시나마 뛰어다니며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줍니다.
특히나 이곳에는 손님들이 와서 남긴 그림이나 글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도 갈 때마다 이곳에 우리가 다녀온 흔적을 남기고 온답니다. 아마도 우리가 이 카페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가게 안 곳곳에 우리 가족의 추억이 새겨져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 우리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이곳에 앉아 어떤 그림을 그렸었지, 그런데 그 그림이 지금은 없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남기고 가볼까'
큰 아이는 이곳에 들를 때마다 나름의 그림과 짧은 그림을 남기는데, 그 그림들을 찍어둔 사진을 보면 그림 실력이 조금씩 느는 게 보입니다. 아이도 크고 그만큼 우리의 제주 추억도 더욱 풍성해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