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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미 Feb 08. 2021

아직 철이 없다.

대책 없이 살아왔나 싶은데 아직도 대책이 뭔지 모름.

결혼을 한 지 거의 두 달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식을 올린 지 두 달이 되었다는 말이다.

근 8년 간 해온 자취 생활이 지쳐서, 빨리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식을 올리기 여덟 달 전부터 나름대로 맘에 드는 전셋집을 구해 대출을 받고 가전을 채우고 같이 지냈다.

두 사람 다 결혼에 있어서 까다로운 기준이 있지 않았고, 이렇다할 로망도 없었고 그래서 큰 욕심 없이 무난하게 진행해온 '나름의' 결혼생활이었다. 지금도 사실 우린 무난하다. 


어려운 시국에 결혼식을 올리고 감사 인사를 전할 때마다 회사의  선배들은 묻는다. 


"결혼하니까 어때, 좋아?"


그다지 기분 나쁠 이유도 없고 그들마저도 그저 인사치레의 하나일 뿐인 걸 알기 때문에 물 흐르듯 대답하곤 했다. 원래 같이 살아서 다를 것도 없습니다, 내지는 그럼요 좋죠~


축하한다는 인사와 종종 받는 저 질문이 싫지 않았다. 아, 내가 결혼을 하긴 했구나. 이런 질문을 받는 거 보니 꽤 새삼스럽긴 하네. 내가 결혼하는 날이 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 물 흐르듯 결혼식도 올리고 이런 질문도 받고 있네, 이상한 의미로 제법 어른 같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어딜 가나 꼭 한 걸음씩 앞서가는 분들은 있게 마련이다.


"애는 언제 낳게? 낳을 거면 빨리 낳아야지."

"청약은 하니? 집은 어쩌려고, 돈 아껴서 집부터 사."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으로도 가깝게 지내는 분들에게서는 저런 질문을 얼마든지 들어도 좋았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나를 더 가깝게 생각하는 분들의 저런 질문에서는 애정이 느껴진다기보다 그냥 귀찮음만 남을 뿐.

그나마도 회사에서 소위 말해 웃으면서 할 말 하는 캐릭터, 혹은 웃는 얼굴로 좀 X랄 맞은 캐릭터라 농담처럼 받아치곤 했다.


돈이 어딨어서 애를 낳아요, 키워주실 거 아니면 그런 말씀 마셔요.

청약 해요. 저 돈 많아서 내일 강남에 집 사러 가요, 걱정 마세요.


며칠 전엔 업무적으로 존경하는 선배와 먼저 퇴사한 또 다른 선배와 저녁을 먹었다. 연차에서 차이가 꽤 많이 나는, 나에게는 꽤 하늘같은 선배들이었다. 부동산 투자의 귀재라는 별명을 가진 큰 선배는 벌써 크고 작은 집을 세 채나 소유했고, 얼마 전 청약 당첨된 집에 입주한 작은 선배는 강아지 한 마리와 골드 미스의 삶을 즐기고 있다.


대체로 그 날 대화의 흐름은 그랬다. 잠깐의 회사 뒷담화, 큰 선배가 작은 선배에게 너는 어쩌려고 그렇게 오래 쉬냐 얼른 취직해라 결혼도 안 하고 강아지랑 산책하지? 큰 선배가 나에게 지금부터 돈 모아라, 애는 빨리 낳아서 키우는 게 좋다, 어쩌려고 돈을 그것밖에 안 모았냐, 빨리 다른 동네로 나와서 집부터 사라.


적다 보니 머리가 아프고 큰 선배가 나쁜 사람인 것 같지만(ㅋㅋ) 정말 애정어린 말이었다.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쨌든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이지만 애정은 제법 느껴지던 말들이었다. 그런데 그냥 듣기가 싫었다. 


서른 둘 짧다면 짧은 인생이지만 일평생을 멀리 내다보지 않는 게 내 신조였고 그렇게 지내왔다. 앞선 걱정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일을 즐기고, 즐길 뿐만이 아니라 해야 되는 일은 눈 앞에 있는 것부터 차례차례 성실하게 해내자고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그게 잘 통하지 않는 세상인가보다.


청약은 한 달에 얼마쯤 넣고 있고 소액이지만 저축도 하고 사는데 생각해보니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위해 쓸 돈도 따로 있어야 하고, 커지는 가족을 다 수용할 집을 구하려면 지금 모으는 돈으로는 턱도 없더라 이 말이다.


돌아와서 집에 있는 사람과 이런 줄거리로 의논을 좀 하다보니 또 도망이 가고 싶어졌다. 돈? 모으지 뭐, 몰라 어차피 집은 비싸고 나는 버는 돈이 이 정도인데. 알아보면 되지 뭐. 일단 저녁 먹자.


철이 아직 하나도 없다. 근데 어떻게 해야 철 드는지 모르겠어서 또 대책 없다. 잘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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