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팔기만 하다가 내 청첩장 주문해보는 기분
청첩장 팔이로 지낸 지 햇수로 3년차,
곧 있으면 꽉 채운 3년이 되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재직 기간 동안 팔아 치운 청첩장만 해도 몇 백만장, 몇 천만장은 될 거다.
우리만 잘해서 벌어들인 돈도 아니거니와, 잘해도 욕 깨나 먹을 수밖에 없는(!) 매출 관리 부서에서 일하다 보니 가장 실감나게 수치로 얘기하는 사람도 우리 팀이었고, 이런 애로사항이 있는 와중에도 받는 사람에게는 그저 종이 한 장일 테지만 막연하게 의미 있는 일에 몸 담고 있다 생각한 적도 꽤 있었더랬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청첩장을 팔아서 매출 달성하자며 호기롭게 '장사하자', '돈벌자' 구호를 장난처럼 외쳐보기도 했고 말 그대로 장사가 안 되면 똥줄이 바싹 타는 기분 느껴가며 지내오는 동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내 이름 석자로 접수된 주문은 오직 신제품 테스트 주문 건밖에 없었는데요,
그래도 이 회사 다니는 동안 결혼해서 청첩장은 공짜로 해먹어야지 하던 농담 사실 반 쯤은 진심이 아니었는데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온갖 미디어에서 코로나 얘기만 하던 가장 위태롭던 시절에 KF94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예식장을 둘러보다 예약한 게 2월, 어차피 같이 살 거 호다닥 같이 살자 하며 8년 차 자취 생활 마무리한 게 4월, 이 모든 걸 알아서 하라며 부모님들께서 허락해주신 덕에 뒤늦게 상견례 진행한 게 5월, 답지 않게 죽어라 싸우면서 도착해놓고 드레스 입어보자마자 둘 다 어설프게 기분 푼 게 6월.
엥, 어쩌다 보니 나도 결혼 준비하는 예신이 되어 있더만. 아직도 예신님, 신부님 이런 표현 너무 부끄럽고 막 닭살 돋고 약간 좀 멋쩍고 뭐 그렇지만 공식적으로 예신은 예신이다.
헤헤 저 결혼해요, 하고 선언하면 여기저기서 돌아올 축하 인사도, 조금은 듣기 거북한 농담들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서 "청첩장 공짜로 해주세요" 기안 상신을 미룰 때까지 미뤄봐야지 했지만
그래도 직무가 MD고 생산부서 지원부서 어떻게 돌아가고 언제 바쁜지 빤히 알면서 그 분들 야근할 적에 청첩장 인쇄해 주십쇼 하기가 영 낯부끄러워서 곧 공포의 커밍아웃 앞두고 있다.
2년 전 이 큰 일을 치른 동갑내기 친한 동료는 '그까짓 거 한 마디씩만 들으면 그만인데 뭐, 근데 그 한 마디가 80명한테서 오니까 80번만 참아라.'같은 농담인지 뭔지 모를 조언을 하긴 했는데요,
입방정 떨고 다니며 아 저 관종입니다. 저 어디서나 주목 받고 싶은 병 있어요. 라면서 넉살 좋게 깝죽대고 다니던 회사 생활과 달리 <앗 저 결혼해요> 커밍아웃은 이상하리만큼 겁이 나더라 이 말입니다.
어쨌든 미루고 미루다 안 되겠어서 아무도 몰래 주문 넣어놓고 복작대는 중이다.
그 동안 우리 청첩장 주문한 고객이 수백 수천명일 텐데, 늘 파는 입장에서 고객 중에 한 명이 되고 보니 정말이지 감회가 새로운 것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2주 전 쯤 몰래 주문을 넣고 단짝친구이자 편집 파트에 일하는 동료분께 다른 고객은 할 수 없는(!) 직원 특권(!!) 커스터마이징 디자인을 의뢰했다. 코로나 덕에 밀린 예식이 꾸준히 밀려들어와 야근을 하는 와중에도 내 청첩장만큼은 전력을 다해 주겠다던 의리녀가 완성해준 내 초안이 오늘 나왔고, 그걸 보는데 참 주책맞게 기분이 얄딱구리하더라만.
3년 간 일하면서 너무 예뻐요 혹은 고맙단 말 한 마디 예쁘게 해주는 감사한 고객도 많았지만 일생일대 중요한 일을 치를 청첩장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mm단위로 수정 요청하는 고객들도 많았고 결혼준비의 수많은 과정 중에 비용은 적게 들지만서도 최종 단계에서 치르는 일인 만큼 예민해진 고객들의 성화가 꽤 많기도 했다.
지원 부서가 아닌데도 시달리는 느낌을 받은 적이 몇 번쯤 있었고, 사람이 직접 하는 일인 만큼 지원 부서에서 전해오는 애로사항을 듣다보면 나도 인간인 지라 너무하다 싶은 케이스들도 있었다. 그래도 고객은 왕이니까, 인륜지대사를 치르는 과정이니까, 하고 이해하려 해도 고단함으로 다가온 게 사실이고.
근데 청첩장을 고르고 초안을 만들다 보니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나더라는 게 참 이상하지. 결혼준비 과정 내내 플래너가 되려 빨리 선택하라고 애원할 만큼 이 모든 과정에 대해 복잡스럽게 생각하지도 스트레스 받은 적도 거의 없었는데,
완성된 청첩장 초안 위에 적힌 나와 짝지 이름을 보니까 전에 없이 결혼이 실감나고 감개가 무량하더라 이 말이다.
매일 바빠서 야근을 밥 먹듯 하는데도 내 주문이라고 일일이 편집해준 동료 언니에게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단순히 고마운 게 아니라, 이런저런 고객에게 시달려서 생각지 못했겠지만 언니 하는 일 되게 대단한 일 같다고. 그냥 단순히 이름 석자, 예식장 이름 타이핑해주는 게 다가 아니라 엄청난 감정을 선물해 주는 일이네. 하고 웃으면서 고맙단 말을 대신했다.
회의 때마다 팀원들과 언급하는 전제가 이거다.
"아니, 고객 입장에서 어떤 게 좋을지 생각해 보자고."
근데 말여, 아무리 백날 고객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자부했어도 지인짜 고객이 되고 보니 수없는 테스트 과정에서 느껴지지 않던 게 보이고 느껴지는 게 참 별난 경험이었다.
아무튼 이 회사 오래 안 다녀야지 했는데 "아 내가 결혼해 봐서 아는데!" 하고 헛소리 하면서 더 다닐까 걱정되는 월요일이다.
그리고 이 글 적으며 청첩장 초안 다시 보니 아, 정말 가는구나- 하고 오만가지 감정이 다 드는 월요일이다. (여보 나 행복해,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