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미 Sep 27. 2021

습관적 '고맙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은 못 갚지만 그냥 나 좋자고 한다


지난 회사를 다니던 시절, 이제 막 입사 3개월 차로 진입했을 때 옆 팀 선배가 다른 선배와 점심 한 끼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며칠에 어느 식당으로 가자, 기분 좋게 약속을 잡아두고 메신저 마지막 인사를 이렇게 했었다. 


'네, 그 날 뵐게요! 감사합니다~!'


나이는 나보다 예닐곱살 많고 직급은 두 자리 높은 그 선배는 메신저에 ㅋㅋㅋ를 치고 나서 되물었다. 


'ㅋㅋㅋ 밥 먹자는 게 뭐가 감사해요 ㅋㅋㅋ'


며칠 전 자기 전에 샤워를 하다가 왜 그 날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회사 생활을 7~8년 쯤 하면서 매일 습관처럼 '감사합니다'를 마무리로 덧붙였지만 그 날처럼 웃으면서 곱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게? 밥 먹자고 하는 게 왜 감사하지? 하고 웃었는데 그냥 뭐 감사했다. 입사한 지 석 달 지나 아직도 어리버리한 얼굴로 엇, 제가 할까요? 엇, 이건 어떻게 하는 걸까요? 하는 중고신인에게 먼저 두런두런 얘기나 하며 밥 한 끼 먹자고 제안해 준 것도 고마운 일 아닌가.


첫 직장 생활은 스물 셋이었다. 정식 사원도 아니었고 아직 대학교 졸업장도 못 받은 휴학생 신분으로 얼 타기 일쑤였던 반 년이었지만 그래도 직장은 직장이었다. 인턴 사원 신분으로 회사 블로그에 글 써가며 블로그 말미에 내 사진이 박힌 '온라인 명함'을 내걸면서 이게 얼굴 팔리는 일인지도 모르고 와 나 직장인 같어- 하고 스스로 경탄하던 게 정확히 9년 전 일이다. 첫 직장 생활의 임팩트는 크지 않았고 나한테 일 이상하게 시키는 상사 뒤에서 찡그린 얼굴 하기 스킬 같은 거나 배웠다. (인성 무엇)


두 번째 직장 역시 인턴 사원 신분으로 1년을 지냈다. 요즘도 그렇다고들 하지만 '정직원 전환 조건'의 인턴 사원으로 시작해 계약 기간이 만료될 즈음이 되자 갑자기 '쟤가 꼭 정직원으로 필요해?'라고 말 바꾸는 회사 대표 태클에 자존심 상해 '아 ㅎㅎ 저 다른 데 알아볼게요'라고 웃으며 나왔지만 속쓰렸던 두 번째 회사.


그래도 이런 게 직장생활이구나,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보고 배우게 해준 사수님이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 분만 따라해야지- 하면서 배웠던 직장 생활의 쪼(!)가 요즘도 남아있는데 뒤에선 몰라도 앞에서 나쁜 말은 별로 안 들어봤으니까 잘 배웠다고 생각했고, 그 사수님은 아직도 내 직장 생활의 모토다.


사수님 메일의 마지막엔 언제나 [감사합니다 / OOO 드림.] 이라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 배워 내 메일 서명함에 끼워 놓아 내 마지막 인사도 자동적으로 '감사합니다'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직장을 다녀보니 다들 나보다 선배였고, 다들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그러니까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늘 막내는 나였다. 내가 뭘 잘 모른다 싶으면 '죄송한데'로 인사를 시작하며 한 번 더 알려주실 수 있냐 물었고, 내 말에 대답만 해줘도 꼬박꼬박 '감사합니다'로 끄덕이기 바빴다. 운 좋게도 어리다고 막 대하는 동료들은 없었으니 그것도 내 복이다 싶다.


직장을 여러 번 옮겼고, 평생 막내일 줄 알았는데 점심을 먹으러 가면 나보다 더 빠르게 물잔에 물을 따라 나를 당황시키는 후배들이 생겼고, 매일 이름만 불릴 줄 알았는데 유머로만 중얼거리던 '로케트 박대리', '사랑의 박대리'가 내가 되는 날도 왔다(성별과 나이를 떠나 주변에 아재들이 많다.). 그래도 여전히 내 또래보다 윗분들이 많아 인턴 시절 꼬꼬마의 조심스러운 말투가 아직도 남아있고, 후배들에게도 습관적으로 '오 고마워요 오 고맙슴다'를 중얼거리며 괜히 긁적거리는 시늉도 한다. 


옆 팀에 찾아가 일을 부탁하면서 '바쁘시죠, 죄송한데 이거 오늘까지 가능할까요? 스케줄 안 되시면 말씀해 주세요'로 시작해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는 내게 다른 선배가 술자리에서 한 말이 있다. 어차피 다들 할 일 하는 거고, 마땅히 각자 할 일을 해달라고 하는 건데 그렇게 비굴하지 말라고. '부탁'이 아니고 '업무 전달'이라고. 술기운에 허허 그런가요 하고 넘어갔지만 마음 속에선 이해가 안 갔다.


선배 말에 틀린 내용은 없었다. '어차피 다들 할 일 하는 거', '마땅히 각자 할 일을 해달라고 하는 거'. 내 조심스러운 말투 때문에 상대가 우위에 서서 업무로 갑질을 할까 싶어 노파심이 생긴 선배의 조언이었지만 운 좋게도 주변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좋게 말하면 다들 좋게 들어주었다. 생각해보니 좋게 말할 때 좋게 안 들어주면 제법 발톱도 내밀었던 것 같은데, 선배는 내 발톱과 성질머리를 몰라서 걱정해 주었던 것 같다.


제법 자존심이 센 편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업무에서의 자존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나한테 뭐라고 못 하게 꼬투리 잡힐 거 없이 일 해놔야지, 두고 보자. 나를 무시하면 알겠어 다시 해서 보여줄게, 하고 웃어 보이는 게 내 자존심이었다.  일할 때는 곧잘 죄송해하고, 곧잘 고마워하고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이 스스로 쿨하다고 심취할 때도 있었다. 업무를 하면서 내뱉는 '죄송하다', '고맙다'의 절반은 진심이었고 절반은 진심이 아니었다. 모든 일은 사람과 사람이 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왕 일 맡길 거 상대를 치켜 세워 주기도 하고 별로 고마울 거 아니어도 그냥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면 수월하게 넘어가곤 했으니까. 


+ 그리고 이건 친한 후배들한테 주었던 팁인데, 실수해서 혼날 때 바로 토 달면 안 된다. '죄송합니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하고 고개 숙이면 더 혼낼 선배는 없다. 거기서 계속계속 더 혼내면 도라이다. 그럼 또 그런 도라이는 상종 안 해야 되니까 더 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가야 된다. 도망가려면 '죄송합니다'의 반복이 짱이다. 혼날 때 깊게 자책하지 말고 머리로는 딴 생각 하면서 입으로는 죄송합니다, 하면 최대한 짧게 혼날 수가 있다. 그 자리는 빨리 떠야 된다. 그러고 빨리 도망가서 수습하면 해결된다. 말로는 쉽지만 막상 쉽지 않은 내 나름의 팁이다. (이렇게 해서 크게 혼날 것도 크게 혼나본 적 없는 약아빠진 놈의 요령)


어쨌든 며칠 전에 갑자기 떠오른 수년 전 에피소드 때문에 다음날 출근하고 나서 내가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나 말하고 적는지 대강 세어보았다. 그 날 보낸 메일이 6통쯤 되었고 메신저로 논의한 내용이 3건 정도 되니 문자로는 총 9번 정도, 통화는 2통 정도 했고 밥 먹을 때 과장님이 햇반 껍질도 까주셔서 감사해 했으니 구두로는 한 3번 정도 했나보다. 나도 모르는 새 하루에 10번이 넘는 '감사'를 한다. 상대가 내 '감사합니다'를 정확히 듣지 않았어도 괜찮다. 어차피 나도 상대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감사하다는 인사로 웃긴 웃었을 거다.


(커버 사진 :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의 기분 좋은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