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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미 Nov 08. 2019

오늘의 기분 좋은 일

억지로 생각해보다가 진짜 기분 좋아지는 방법

주변에 매사 투덜거리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나라고 뭐 늘 긍정적이고 꺄항 이거 좋아 저거 좋아 세상 모두 다 행복해 하는 건 아니지마는, 무슨 얘기를 해도 미간부터 찌푸리는 탓에 텍스트 몇 자로만 이야기를 나눠도 주변인 기운까지 다 빼앗아가는 친구. 이가 아프대서 치과를 가랬더니 야근해야 된다고 울먹거리던, 그럼 주말에 치과를 가보라 했더니 주말에 하는 데가 근처에는 없더라는, 내가 찾아줄게 기다려봐 했더니 주말에도 출근해야 될지도 모른다며 또 울적해지던, 그런 친구가 있었다.


아이고 어떡해, 그것 참 많이 아프겠다 어쩌냐- 따위의 '내가 네 얘기를 최선을 다해 듣고 공감하고 있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감정에 치우친 공감을 잘 못하는 본인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매사 내 기운까지 뺏어가는 친구에게 이미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 쯤은 알아버린 차였다.


그 당시에는 꽤 가까웠던 친구였기 때문에 인연의 끈을 한 방에 놓아버릴 수가 없어 내 기준의 묘책을 하나 냈던 게 그것이었다. 


잠들기 전에, 하루에 딱 두 가지만 그 날의 좋았던 일을 떠올려 볼 것.


로또 당첨, 적금 만기, 연봉 1천만원 오름, 상여금 400% 받음. 같은 게 매일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어 다들 조금은 구질구질하게 살아가고 있는 탓에 하루에 꼽게 되는 두 가지 기분 좋은 일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정말 골똘히 생각해봐도 좋은 일이 없었다는 친구가 내게 반문했었다. 그러는 너는 도대체 무엇이 좋았더냐.


'아침에 출근할 때 시간 겁나 촉박한데 신호가 딱 타이밍 맞게 초록불로 바뀌더라, 그거 기분 좋았음.'

'나 요새 변비 있는데 화장실 시원하게 갔다옴. 티엠아이 ㅇㅈ?'


친구는 그게 뭐냐고 비웃었지만 내 제안의 의미가 그랬다. 진짜 별 거 아니어도 좀 기분 좋아보자. 무조건 힘내라, 세상은 아름다워를 강요하긴 싫지만, 매번 얼굴 찌푸려봐야 뭐하겠나 싶어서 들이댔던 아이디어가 나름 힘들었던 몇 개월 기간동안 일기장의 주요 테마가 됐다. 하루에 두 개씩 적다 보니 '허접한 좋은 일'이 꽤 많이 쌓였는데 주로 이런 식이다.


'드디어 면접오라고 연락 왔음.' - 곧잘 되던 이직이 맘처럼 안 돼 6개월 간 백수생활을 하던 때.

'오늘 우리 팀 배구 역전승했음.' - 이건 아직도 기분 좋음.

'아침에 도시락 싸와서 돈 아낌.' - 그러고 저녁에 비싼 거 사먹은 건 고려 안 한다.

'팀장님이 커피 사줌. 개이득.' - 이럴 땐 무조건 프라푸치노다.

'출근 버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음.' - 꿀잠이 가능한데 창문도 열어둘 수 있는 자리.

'어제 주문한 책이 오늘 옴.' - 카드값을 무시한 좋은 일.

'내년 추석 연휴 비행기표 예약함.' - 역시 카드값은 10개월 뒤의 내가 다 해결했을 거야.

'갑자기 회식하자고 해서 기분 나빴는데 공짜 고기 맛있었음.' - 술도 맛있었다.

'며칠 째 속썩이던 여드름이 드디어 나옴.' - 티엠아이 또 ㅇㅈ?

'진짜 귀찮았는데 빨래 개고 잤음.' - 스스로가 대견함에 기분 좋음.

'혼자서 산에 다녀왔다.' - 언덕에 가까운 낮은 아차산, 그래도 정말 기분 좋았다 이건.


말 그대로 별 거 아닌 이 일들 덕에 그 하루한테 미안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 하기로 했던 일을 맘처럼 끝마치지 못했어도 그 와중에 맛있게 먹었던 점심밥이 기분 좋고, 어제보다 몸무게가 늘어서 내 몸이 원망스러워도 그 와중에 깔끔하게 자른 손톱을 보고 있으면 기분 좋고, 너무 피곤해서 집안일 하기가 정말정말 싫어도 청소하며 듣는 음악이 기분 좋고, 갑자기 약속을 취소한 친구가 원망스러워도 그 김에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니까 의외로 기분 좋고 그랬다.


매일 부지런히 일기를 못 쓰는(안 쓰는) 요즘이라 기분 좋은 일을 두 개씩 꾸준히 놓쳐왔지만 그 참에 내년 다이어리 하나 근사한 걸로 사야지 생각하니 돈 쓸 생각에 기분 좋고, 그 투덜이 친구와는 이제 일년에 연락을 한두통 주고받는 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그 친구 덕에 제법 괜찮은 습관 하나 생겼으니 그것도 기분 좋네.


내년 다이어리 사면 다시 좀 시작해봐야겠다. 역시 다이어트와 다짐은 내일부터, 다음달부터, 내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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