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옆집 은퇴부부의 두 마리 토끼 잡기 1

걷는 즐거움, 읽는 즐거움(섬진강 편)

by 숲song 꽃song
3월 산수유꽃이 절정일 때 작성했던 글입니다. 혼란스러운 정국과 산불사태에 도저히 봄을 노래할 수 없어서 때를 기다렸다가 이제 올려봅니다.

홀린 듯 봄기운에 이끌려 섬진강에나 가보자 했다.

남원에서 구례 산동으로 넘어가는 밤재터널을 빠져나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 순간,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 생각났다. 머릿속 문장은 재빠르게 눈앞의 풍경에 맞게 뀌었다.

'군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산수유꽃의 고장이었다. 하늘아래 온 천지가 노랗게 일렁거렸다.

출발할 때의 마음은 섬진강 따라 내려다가 봄을 데리고 올라 올 참이었다. 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생각이 바뀌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산동마을로 들어섰다. 그동안 자주 바람 쐬러 오가던 길이었지만 산수유 꽃 필 즈음, 축제가 열리는 산동마을 한 번도 들러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편과 나, 둘 다 축제의 번잡함과 떠들썩함, 그리고 무엇보다 교통체증에 진저리 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은퇴하고 나니, 가장 좋은 것이 평일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번잡함을 싫어하는 우리는 이제 아름다운 풍광을 찾거나 걷기 좋은 길을 찾아 나설 때면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평일을 이용한다.




산수유마을은 생각보다 넓고 햇살이 막힘없이 쏟아지는 아늑한 골짜기에 위치하였다. 마을 뒤로는 지리산 만복대 산줄기가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만복대 정상에 오를 때마다 산동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큰 바위에 아, 저곳이 산동 산수유마을이겠거니 짐작만 했었다. 평일이라지만 산수유꽃이 만개할 때라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곳은 따사로운 봄햇살 속에 노란 산수유꽃무더기들이 마을의 집들과 돌담과 어울려 딴 세상 이루고 있었다. 축제행사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산동마을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를 걸어보기로 했다.


축제 안내 홍보글을 읽어보니, 산수유 마을에는 다양한 탐방 코스가 있어 소요시간과 코스를 선택하여 걸을 수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중에서 산동에서 가장 높은 마을이자 산수유 고목나무가 많은 상위마을의 풍경길을 선택했다. 이 코스는 산동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한 경작지를 대신해 집 근처 돌담, 마을 어귀, 계곡 등에 산수유나무를 심고 가꾸어온 삶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마을에는 큰 바위들 틈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각시계곡이 있는데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고 계곡 주변에 심어진 산수유 고목과 대숲을 함께 바라보며 걷기에 편안했다. 돌담길 따라 마을 산책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산수유고목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말해 무엇하랴. 그저 마음 한가득 솟구치는 감흥을 흘러넘치게 놔 둘 뿐이다.

산수유 고목들이 모여있는 군락지에는 최고의 인생사진을 남기려는 여인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산수유나무 그늘아래로 노랗게 반짝이며 떨어져 쌓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짐짓 산수유꽃에 눈길을 주는 척하며 한참을 힐끗거리다가 마음 어디쯤에 묻혀있던 문태준의 시가 불쑥 생각나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발길을 옮긴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계곡물 따라, 돌담집 따라 기웃기웃 걸으며 한나절 꿈결처럼 둥실둥실 떠다녔다.




정오에 가까워지면서 나른하게 어른거리기 시작하는 산수유꽃을 뒤로하고 섬진강 은빛물결 위에 마음을 띄워보기로 했다. 산동마을을 빠져나와 구례로 접어드니 청매, 홍매들이 '여기 나도 있다'라고 실눈으로 웃음며 살랑댄다. 아직 완연하게 벙글지 않은 청매, 홍매에게는 슬쩍 곁눈질만 해며 '너희는 며칠 후 다시 만나 제대로 희롱하며 놀아보자'라고 달래어는다.

넘쳐흐르는 춘정을 살짝 식혀보려 섬진강변의 제법 운치 있다는 카페를 찾았다. 이곳에서 차 마시고 숨도 고르면서 한나절 책을 읽고 가려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은퇴 후 '따로 또 같이'를 불문율처럼 지키며 살고 있다. 노후의 생활만큼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틈틈이 부부가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냄으로써 남은 여생을 서로 여한이 없이 살다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각자의 취미생활과 동호모임 활동을 하며 자유롭게 지내다가 둘 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함께 길을 나서곤 한다. 대부분 걷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의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목적이다. 나이가 있으니 오전엔 2~3시간 정도의 걷기 좋은 길을 걸으며 건강도 챙기고, 오후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배움과 성장도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도 봄마중할 겸 섬진강 따라 내려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걷기도 하고 책도 읽으려고 나선 길이었다.

책을 읽던 중 득 창밖을 바라보니 섬진강 윤슬이 반짝반짝 눈이 부시다. 연둣빛 능수버들 한바탕 불어오는 봄바람에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다.

짐짓 책으로 눈을 돌려보지만, 자꾸만 불러대는 봄바람과 봄햇살이 짓궂기만 하다. 책에 눈은 두고 있지만 마음은 밖으로 달아나려고 해서 읽은 둥 만 둥이다. 한참을 버티어보다가 두 손 들고야 만다. '에라 모르겠다. 이럴 땐 별 수 있나' 펼쳐진 책은 저 혼자 놀라고 하고 눈길과 마음은 봄이 이끄는 대로 그저 풀어놓는 수밖에.

【옆집 아내가 읽고 있는 책】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오늘의 책꼽문》
1.*바빌론의 탑 p27.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밤의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밤이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대지의 그림자였다.

2.*영으로 나누면 p146~147.
내가 마음속 깊이 무조건적으로 믿고 있었던 무엇인가는 결국 진실이 아니었고 그걸 증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칼은 르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자기도 정확하게 알며 그 자신도 그녀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떼어놓는 종류의 감정이입이었고 그녀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옆집 남편이 읽고 있는 책】 나의 눈부신 친구/엘레나 페란테

《오늘의 책꼽문》
p50.
내게 학교는 등교 첫날부터 집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곳이었고 등굣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슬며시 강변으로 내려온 산그늘에 등 떠밀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둘 다 음악에 잠겨 차 안은 조용하다. 유난히 큰 '깨톡'소리가 정적을 깼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오프닝 노래를 친구가 보내온 것이다. 구도 넘치는 봄기운을 혼자 품고 있기엔 벅찼던 모양이다.

친구의 마음을 냉큼 받아 몇 번을 거듭 듣는다. 어느 순간 도 모르게 비음 섞인 목소리로 묘한 매력을 발휘하는 김정미의 노래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간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봄 봄 봄 봄 봄이여!♬

콧소리까지 잔뜩 넣어 저절로 따라 흥얼거리게 하는 바야흐로 봄! 봄! 봄!이다.





< 덧붙임>


소설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첫 문장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산동 산수유 마을의 대표적인 탐방코스>


*제1코스 꽃담길 : 대표적인 산수유 탐방로로 3.6km 길이에 약 1시간 10분 소요

*제2코스 사랑길 : 산수유 군란 지를 지나며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코스로 3.1km 약 50분 소요

*제3코스 풍경길 : 산동면의 아름다운 경관과 산수유 농업이 어우러진 길로 3.1km, 약 50분 소요

*제4코스 천년길 : 천년을 이어온 '할아버지 나무'를 만날 수 있는 산책길로 2.6km, 약 40분 소요

*제5코스 둘레길 : 현천제에 반사된 산수유꽃과 지리산 둘레길이 어우러지는 길로 1.4Km, 약 30분 소요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오프닝 노래 가수 김정미의 '봄'가사


빨갛게 꽃이 피는 곳

봄바람 불어서 오면

노랑나비 훨훨 날아서

그곳에 나래 접누나

새파란 나뭇가지가

호수에 비추어지면

노랑새도 노래 부르며

물가에 놀고 있구나

나도 같이 떠가는 내 몸이여

저 산 넘어 넘어서 간다네

꽃밭을 헤치며 양 떼가 뛰노네

나도 달려 보네 파란 바닷가에

높이 떠올라서 멀어져 돌아온다네

생각에 잠겨 있구나

봄바람이 불어 불어오누나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봄봄

봄 봄 봄이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