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14년 차. '꽃잎인연'이여, 영원하라!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그때 생각만 하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오호홍, 우리가 그랬다는 거지?"
올해로 독서 모임의 막내까지 모두 나이 앞에 '6'자를 달았다. 아무리 출발이 좋았던 모임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10년을 넘기기 힘들다는데, 우리는 벌써 14년째다. 모임의 시작은 퇴근 후 가까운 천변을 걷다 우연히 이루어졌다.
저녁 산책 길에 자주 마주치게 되어 함께 걷게 된 여자 다섯 명.
슬슬 정이 붙자 밥이나 한번 먹자고 했고, 그 자리에서 한 달에 한 번 독서 모임을 해보자는 이야기로 발전했다. '꽃잎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독서 모임은 서로의 이름을 넣어 'OO 꽃잎'이라 부르며 매달 한 번씩 책 꽃을 피웠다. 14년째 이어지는 동안, 한 꽃잎은 귀촌을 했고, 한 꽃잎은 개인 사정으로 빠졌으며, 세 꽃잎은 은퇴를 했다.
유일한 현직 교사인 막내 꽃잎이 방학을 맞아 얼마 전, 2박 3일로 함께 부안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독서 모임을 겸한 여행이었다. 구체적인 일정은 따로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 2박 3일이 얼마나 알차고 충만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모두 설레는 마음이었다.
출발 당일, 전국에 눈 예보가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 눈이 많이 와서 출발 시간이 오후 1시로 늦춰졌다. 부안에도 당연히 눈이 와 있을 거라 여기며 안전을 위해 곧장 숙소를 향했다. 다른 때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벌써 몇 군데를 다녀오고도 오후 일정이 남아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김제를 지나 부안에 이르도록 눈이 내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한나절을 그냥 흘려보내나' 살짝 아쉬워질 즈음, 여행 고수 K 꽃잎이 방향을 틀었다.
"부안읍에 신석정 문학관이 있는데, 들렀다 갈까요?"
두말하면 잔소리다. 우리는 그냥 지나칠 뻔한 신석정문학관에서 시인에 대한 존경과 애정으로 가득한 해설사의 설명을 세상 진지한 눈빛으로 꼼꼼히 새겨 들었다.
네 꽃잎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바라보며, 해설사의 설명은 어떤 대목에서는 결연했고 어느 대목에서는 물기가 어렸다. 뜨거운 마음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 주는 방문객이 고마웠을까? 다정하게 배웅을 해주던 해설사가 가까운 곳에 이매창 공원이 있다며 그곳도 가보면 좋아할 것이라고 권했다. 신석정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부안 곳곳에 남아있는 매창의 전설과 노래를 들으며 자랐고, 그녀의 문학적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창이 남긴 58수의 한시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현대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였다고 한다. 매창 테마관으로 이동하는 꽃잎들의 발걸음이 봄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경쾌하게 통통거렸다.
방문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고 퇴근할 뻔했던 매창 테마관의 해설사는 우리를 반기며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배움의 열기에 마음이 한껏 달아오른 채 다시 숙소로 향하던 길, 우연히 들른 두 곳이 그날 저녁 이야기 나눌 책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변산 해변에 위치한 숙소에서 맨밥에 배추 된장 쌈과 김치만으로도 최고의 만찬을 즐길 줄 아는 네 꽃잎.
슬슬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책을 꺼내 둘러앉았다. K 꽃잎이 우즈베키스탄 여행길에서 사 온 코냑을 꺼냈다. 네 꽃잎들은 한 모금씩 뜨거움을 입안에 머금고, 곧장 책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이날 함께 이야기 나눈 책은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은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서 투쟁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장대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독서 토론에서 이야기 나눌 질문들은 단체대화방에 미리 올려져 있었다. '이끔이'의 진행에 따라 네 꽃잎의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때로는 확장된 이야기 따라 샛길로 들어섰다가 돌아 나오고, 엉켜 풀리지 않는 대목은 서로 궁리하여 풀어가며 변산의 밤이 깊어갔다. 밖은 마치 책 서두의 강렬했던 설경을 재현하려는 듯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튿날, 느긋하게 아침 식사와 모닝커피를 즐긴 꽃잎들은 부안의 대표 지질 명소인 격포 채석강을 찾았다. 국가유산포털 자료에 따르면, 채석강은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닭이봉 일대를 포함한 1.5km의 층암 절벽과 바다를 말한다. 강이 아니라 해안 절벽이다.
자연이 빚은 퇴적 예술의 걸작 앞에서 네 꽃잎의 입은 저절로 벌어졌다. 내친김에 닭이봉 정상의 팔각정 전망대에 있는 부안 지질 공원 전시관도 들렀다. 그리고 지난밤의 치열했던 학구열을 식힐 겸 격포항의 두 개 등대 길을 가볍게 걸은 후, 궁항 해변 산책과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쉬었다.
그날 밤,
또다시 탐구열에 불이 붙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고 난 후, 중학교 때 아버지 서재에서 우연히 뽑아 들어 단숨에 읽은 김내성의 대하소설 <청춘 극장>이 떠올랐다는 Y꽃잎의 말이 불씨였다. 세 꽃잎은 그 책이 궁금하다고 했다. 궁금증은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검색 끝에 1975년 변장호 감독이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휴대폰과 TV를 잇느라 애를 먹었지만, 아쉬운 대로 영화로나마 그 책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어서 K꽃잎의 코냑이 다시 등장했다. 네 꽃잎은 목안의 뜨거움을 즐기며 닭이봉 지질 전시관에서 챙겨 온 팸플릿을 펼쳤다. 본격적인 '팸플릿 부안 지질 탐사'가 시작된 것이다. 팸플릿에는 부안 지질의 형성 과정과 다양한 지질 용어 설명, 그리고 지질 명소가 소개되어 있었다. 다들 노안에 접어든 눈으로 깨알 같은 글씨를 서로 돌아가며 읽어내고, 모르는 것은 또 묻고 찾아보느라 그날 밤도 하마터면 하얗게 지새울 뻔했다.
여행 마지막 날 일정은 전나무 숲 길이 아름다운 내소사를 거쳐 전날 밤 팸플릿 지질 공부로 알게 된 굴 바위와 선계 폭포(지질 명소)를 가보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반계사당과 청자 박물관은 덤으로 따라붙었다.
앞서 지나 온 이틀을 떠올려보면 마지막 여정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한 가지만 살짝 귓속말로 전한다면, 그날 네 꽃잎은 처음으로 찾아간 굴바위 동굴에서 '어머! 어머!' 탄성을 지르다가 급기야 덩실덩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야 말았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Y꽃잎은 저녁 8시,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줌으로 진행된 '브런치 작가 북 토크'에 곧바로 참여했다나 어쨌다나.
이 모든 여정을, 나이 앞에 6자를 단 네 꽃잎들이 해냈다는 말이다. 이것이 14년 차 독서 모임의 저력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책을 매개로 배우고, 걷고, 웃으며, 또 다음 이야기를 기약하는 즐거움. 내가 아직도 웃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독서모임 이름인 '꽃잎인연'은 도종환 시인의 '꽃잎인연'이라는 시 제목에서 따왔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