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단자-붉은 보자기의 비밀

by 릿다

카페에 도착한 풀잎은 민서에게 카톡으로 도착 메시지를 보낸 뒤, 광화문에 자리한‘독립일보’ 1층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외관은 20세기 근대식 건축양식이었지만, 내부는 철근과 철골이 그대로 드러난 21세기 인더스티리얼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두 시대가 겹쳐진 이질적인 공간은 묘하게 어울리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풀잎은 밀크셰이크를 주문하고 결제를 마친 후,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이름표를 단 아르바이트생이 옆쪽을 가리켰다.


초록빛 파스텔톤의 문을 열자, 낡은 나무 바닥 위로 좁은 계단이 꺾이며 위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영화에서 보았던 일제강점기 시대 건물의 내부처럼,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었다. 풀잎은 손때 묻어 반질거리는 나무 난간을 짚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올라서자 곧장 화장실이 보였다. 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풀잎에게 고개를 숙인 뒤 스쳐 지나갔다.

굽이 낮은 검은 통굽 구두, 검은 플레어 스커트, 그리고 하얀 블라우스를 갖춰 입은 차림새는 다소 올드해 보였지만, 단정한 인상과 고요한 분위기는 이 오래된 건물과 어쩐지 잘 어울렸다.


화장실에 들어선 풀잎은 세면대 앞 거울을 바라보다 그 아래 가지런히 놓인 붉은 직사각형 보자기를 발견했다.

‘조금 전 그 여자의 것이 아닐까?’

풀잎은 조심스레 보자기를 집어 들고 화장실을 나섰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이미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층 복도를 둘러본 풀잎은 3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개의 방이 이어져 있었지만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뒤돌아가려던 찰나,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풀잎은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4층 복도에는 몇몇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여자의 행방을 물어보려던 풀잎은,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방 안에 있었다.

풀잎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자가 뒤돌아보더니 문 앞으로 다가왔다. 풀잎은 손에 들고 있던 붉은 보자기를 내밀었다.


“이거... 두고 가신 것 같아서요.”

여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아, 고마워요! 한참을 찾아도 안 보여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대체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풀잎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전에... 화장실 세면대에 두고 가신 거 아니세요?”

여자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닌데...”


잠시 머뭇거리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아까 화장실 앞에서 저랑 마주치셨죠?”

풀잎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괜찮으시면... 차 한잔 하실래요?” 여자가 부드럽게 권했다.


‘민서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풀잎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새 방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20세기 초 앤티크풍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풀잎은 조심스레 그 앞에 앉았다.

곧이어 그녀가 내온 홍차와 쿠키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홍차는 살짝 떫었지만, 쿠키는 진한 버터 향과 함께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수제 쿠키네. 정말 맛있다.’ 풀잎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의 붉은 직사각형 보자기에 시선을 두었다

.


“혹시... 사주단자인가요?”

풀잎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던 손을 멈추고,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주단자만 받았고, 아직 택일단자는 보내지 못했어요.”

그녀의 표정에 어쩐지 흐릿한 그림자가 드리운 듯했다. 풀잎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여자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을이 붉게 물들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그는 밭일을 마치고 쟁기를 메고 돌아왔어요. 그 뒷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몰라요. 여학교 교복을 벗어 던지고, 그의 곁에서 밭을 일구고, 손을 잡고 노을진 들길을 걷는 게... 제 꿈이었죠.”


여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제바람이... 정말 하늘에 닿았던 걸까요. 그가 납채를 보내겠다고 했어요. 혼인을 청하겠다고.

그때의 기쁨은... 신만이 아실 거예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풀잎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받았던 사주단자가, 그만 사라져버렸어요.

그날 이후로 계속 찾고 있었죠.”


여자는 붉은 보자기의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고운 한지 위에 남녀의 사주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남자의 사주는 일주 ’임오‘만 남아 있었고, 년·월·시 사주는 모두 비어 있었다.

여자의 사주는 을사년 경인월 정유일, 시주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 사주는... 이미 죽은 사람의 사주인데... 어떻게 납채를 받았을까?‘

풀잎의 가슴에 순간 의문이 스쳤지만, 이내 측은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분의 행방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세요?“

풀잎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풀잎이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행방이요...?

마지막으로 본 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납채 보자기를 흔들며 대문 앞으로 달려오던 모습이었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며 달려오던 그 순간...

아버지가 불러들인 일본 순사가 총을 꺼내 그를 겨눴고, 아버지는 그 총을 빼앗아... 직접 그를 쐈어요.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스럽게 쓰러졌죠. 그런데도 나에게 오겠다고, 흙바닥을 손으로 파며 기어오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여자는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왜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던 걸까요.

아니라고,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만 저을 뿐... 입 한번 열지 못한 채, 눈물조차 참았어요.“

그녀는 이내 자신의 다리를 내려치며 흐느꼈다.

”왜... 왜 그랬을까...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 울음은 오래된 죄책감과 후회의 언어였다. 풀잎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시신이 실려 나간 뒤, 대문 한 귀퉁이에서 그가 들고 온 납채 주머니를 발견했어요.

그 후로 저는 그 보자기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깊은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그 슬픔이 고스란히 풀잎에게 전해졌다.


”이번에는... 언니가 그 납채를 들고, 그를 찾아가 주세요. 그때 함께 죽어주지 못했던 마음, 영혼 깊이 새겨진 그 미안한 마음을... 이 사주에 담아, 꼭 그에게 전해 주세요.“

여자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속삭였다.

”그러고 싶었어요...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말끝은 바람결에 흩어지듯 사라졌고, 여자의 모습도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풀잎의 손에는 두 사람의 사주가 적힌 붉은 보자기만 고요히 남아 있었다.


민서와 카페 앞에서 헤어진 풀잎은,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카페 건물을 바라보았다.

3층짜리 근대식 건물. 붉은 벽돌과 녹슨 철제창살, 세월의 결이 서린 창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낯선 사주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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