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문단속도 확실히 해라. 그럼 마무리 부탁한다.“
민속촌 알바생들을 관리하는 김 팀장이 관람실 열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영욱 선배가 옆에 앉아 있던 민서를 툭 치더니 슬쩍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풀잎아, 이런 말 하면 좀 얌체 같지만, 오늘 급한 동아리 모임이 있어서 먼저 갈게. 다음엔 우리가 남아서 문단속도 하고, 밥도 살게. 충성!“
민서도 두 손을 모아 얼굴 앞에서 흔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안. 나중에 두 배로 갚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민폐 커플은 주차장으로 달아났다.
'해만 끼치는 저 바퀴벌레 커플... 예쁜 나니까 받아주는 거야. 알기나 할까, 저 하등 곤충들이...‘
풀잎은 입을 삐죽 내밀며 관리실을 나섰다.
열쇠 꾸러미 고리를 손가락에 걸고 그녀는 관아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람객이 몰릴 땐 마당도 좁아 보이고, 중앙에 놓인 형틀도 드라마 세트처럼 우스꽝스러웠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지자, 공간은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끌려와 형틀에 묶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일까. 갑작스레 혼자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풀잎은 일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지막 점검 장소인 옥사로 향했다.
진짜 옥사도 아닌데, 안에는 쿰쿰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긴 벽을 따라 위쪽에 난 창문을 통해 서쪽으로 지는 노을빛이 스며들며, 옥사 안은 옅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지막 칸을 확인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옥사 안에 무언가 힐끗 눈에 들어왔다. 풀잎은 뭐지 싶어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이고, 깜짝이야! 관람 시간 끝나서 알바생들 다 퇴근했어요. 끝났다고 아무도 안 알려 줬어요?“
조선 시대 죄수복 차림에, 발이 형틀에 묶인 채 앉아 있는 청년. 풀잎은 그에게 다가갔다.
"와, 진짜 리얼하다. 잠시만요. 열쇠로 발 형틀부터 풀어드릴게요.“
벽에 기대 몸을 기울인 채 축 늘어진 사내. 상투는 산발이 되어 흘러내렸고, 얼굴과 옷자락엔 시뻘건 페인트가 흠뻑 뿌려져 있었다. 방금 고문이라도 당한 죄수처럼 보였다.
"와... 분장 진짜 끝내주네요. 누가 해준 거예요? 설마 직접 하신 건 아니죠?“
그러나 사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풀잎은 열쇠 꾸러미를 하나씩 꺼내어 형틀에 맞춰보며 중얼거렸다.
"얼른 관리실로 가서 다른 열쇠 꾸러미가 있는지 찾아볼게요. 해지기 전에 나가야 하니 서둘러야겠어요.“
풀잎이 옥사 문을 나서려는 순간, 힘없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물 좀...“
돌아보니 사내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요? 생수도 한 병 안 줬어요?“
풀잎은 가방을 내려놓고 보온병을 꺼내 컵에 커피를 따라 건넸다. 사내는 두 손으로 컵을 받아 급히 들이켰다.
잠시 후, 컵을 돌려주며 중얼거렸다.
"무슨 약재길래 이렇게 쓴맛이 나는 거요? 독이 든 건 아닌 듯한데...”
'약재? 아메리카노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유튜브에서 보니 노스코리아 사람들도 블랙커피 마시던데...‘
"더 드릴까요?“
풀잎이 묻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커피를 따른 컵을 받아든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이번엔 한 모금씩 천천히 아껴가며 삼켰다.
"이 약재를 마시니...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소.“
'카페인 흡수가 빠른가 보네...'
풀잎은 속으로 중얼거리듯 생각했다.
"아직 한잔 정도 남았어요. 더 드릴까요?“
사내가 말없이 컵을 내밀었다.
풀잎은 빈 보온병을 가방에 넣으며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가을바람이 스며든 돌바닥은 싸늘했다.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괜찮으세요?“
사내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우, 잘 생겼네...’
잘생긴 사내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안 괜찮소...“
그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에 매달리듯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고개를 숙인 채, 마치 혼잣말처럼 낮게 속삭였다.
"오늘 밤... 아니면 내일까지가 내가 살아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게요. 김씨 일가도 이제는 알았겠지. 나한테 아무리 고문을 해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
풀잎은 숨을 삼켰다. 담담한 얼굴, 체념한 듯한 목소리.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 억울함이 배어 있었다.
"어떤 일에 연루되신 거예요? 혹시... 누명 같은 걸 쓰신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풀잎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는 조선 사람이 아닌 듯하오. 어디서 온 사람이오?“
풀잎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멀리서요.“
사내는 그녀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옥사 바깥 노을로 시선을 돌렸다. 붉게 물든 노을빛이 그의 눈에 잠시 스치더니, 이윽고 그 시선은 다시 풀잎에게로 향했다.
이번엔 그의 눈빛에도, 목소리에도 간절함이 스며있었다.
"내가 다급하지 않았다면... 초면인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하진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다급하오. 부디,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그대가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약속을 이행해 준다면... 나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리다.“
그는 말을 잇다가 무릎을 꿇으려 했다.
고문으로 찢기고 비틀린 몸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살점이 벌어지고, 뼈마디마저 뒤틀린 듯했다. 비명이 입술 끝에서 새어 나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놀란 풀잎이 급히 그를 부축해 벽에 기대게 하고, 조심스럽게 다리를 펴 주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고통에 젖은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초면에 이런 말을 꺼내니,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풀잎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는 한순간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고백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궐의 내의원에서 일해 왔습니다. 승하하신 정조 대왕의 병을 돌본 분도 바로 저희 아버님이셨지요. 그런데 왕께서 뜻밖에도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자, 곧 독살설이 퍼졌습니다.
그 틈을 탄 안동 김씨 일가는 내의원 책임자였던 아버님을 주범으로 몰았고, 하루아침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아버님은 궐의 약재방에서 곧장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 결국 옥사하셨습니다. 저와 어린 누이는 신분을 감춘 채 먼 친척 집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 하지 않습니까. 친척 어른은 누이를 궁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때 누이는 아직 나이 어린데도... 궁녀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그 어른의 양자로 입적되어,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말끝을 흐린 그는 손에 쥔 컵을 들어 조심스레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말을 이었다.
“열한 살 나이에 즉위한 왕 곁에서, 생각시로 지내던 누이는 자라며 임금과 깊은 정을 쌓았습니다. 결국 후궁으로 간택되었지요.”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신분을 숨기고 홀로 궁에서 살아야 했던 누이의 안위가 늘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잡과에 응시했고, 마침내 내의원에 들 수 있었습니다.
왕께서 김씨 일가의 왕비보다 누이를 더 총애하셨습니다. 그 탓에 그들의 질투와 음모는 날로 거세졌습니다.
왕은 누이 외에 다른 후궁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한 누이는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요.
임신할 때마다 유산을 겪었고, 급기야 누이는 물 한 모금조차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내의 눈가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어진 목소리는 한층 더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던 중, 어렵사리 태기가 있었습니다. 진맥을 해 보니, 태아는 이미 제법 자라 있더군요. 그때부터는 모든 음식과 약재가 제 손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바로 왕의 첫 따님... 옹주마마셨습니다.
하지만 태중에서 이미 손을 탄 것인지, 옹주마마는 태어나실 때부터 몹시 허약하셨습니다. 숙의 마마께서는 옹주마마 곁에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셨고, 오직 저만이 곁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사내는 깊은숨을 내쉰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수상히 여긴 김씨 일가가 제 뒤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궐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금부도사들이 저를 잡아들였습니다. 죄목은 ‘정조대왕을 독살한 대역죄인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들은 저와 숙의 마마의 관계를 캐내려 하며 갖은 고문을 가하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를 토해낸 사내는 기력이 다한 듯 벽에 머리를 기댔다. 거친 숨이 이어졌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상투 속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것을 풀잎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여기엔 족보에 실린 나와 누이의 이름, 그리고 사주가 적혀 있습니다. 이 종이만 사라지면, 숙의 마마가 우리 가문의 여식이었다는 증거는 자취를 감추게 되지요. 나와 같은 피라는 걸... 누구도 증명할 수 없게 됩니다.
부디, 이 종이를 없애주시오. 씹어 삼켜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김씨 일가는 내 변까지 감시하고 있으니...“
사내의 목소리에 맺힌 물기가 풀잎의 가슴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풀잎은 손바닥 위의 종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펼쳤다.
박남 박씨 12대손 박진명의 자, 박서동.
을미년 갑인월 무오일 임자시 생.
녀, 박진해. 정해년 계해월...
‘무오생이라... 드넓은 대지를 거침없이 달리는 붉은 말. 그런데 이렇게 생을 마감하다니, 참 안타깝네...’
풀잎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종이를 조심스레 반으로 접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확실하게 없애 드릴게요.“
그 말에 사내는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머금은 눈빛으로 풀잎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불안하신 거예요?“
풀잎의 물음에 사내는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눈빛은 자꾸 마음에 걸렸다.
풀잎은 가방을 뒤적이다가 볼펜 하나를 꺼냈다. 심을 빼내고, 필통에서 작은 가위로 심 끝을 잘랐다.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반지 고리에 달아둔 휴대용 바늘을 꺼내, 볼펜 심에서 묻은 잉크를 바늘 끝에 살짝 묻혔다.
사내는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뭐예요? 그 고문도 견디신 분이...“
풀잎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팔에 약속의 흔적을 남기려는 거예요. 이 자두꽃 문양이... 만약 다음 생에도 팔에 남아 있다면, 그건 제가 약속을 지켰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리고 숙의 마마께서 천수를 누리셨다는 표시가 될 테고요. 잠깐 따끔하겠지만... 안심의 증표니까, 그렇게 억울한 표정은 짓지 마세요.“
사내는 팔에 새겨진 작은 자두꽃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윽고 희미하게 미소를 이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믿지 않지만... 숙의 마마가 천수를 누리신다는 말에... 그 말에 마음이 놓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
”죄인을 끌어내거라!“
풀잎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혹시 또 누가 있나 싶어 옥사 밖을 내다보았다가, 황급히 사내가 앉아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그가 건넨 종이 한 장과, 손에 쥐고 있던 찻잔뿐이었다.
며칠 뒤.
풀잎은 도서관의 조용한 구석에 앉아 『조선왕조실록』 펼쳤다. 그리고 한 줄기 실마리처럼,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다.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숙의 박씨 소생 영온옹주는 어려서 세상을 떠남. 다만 숙의 박씨의 출신과 가계에 대해서는 전해진 바 없다.’
풀잎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가방을 열었다. 사내가 남기고 간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친 뒤, 책 속 이름 아래에 살며시 눌러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글귀를, 천천히 또렷하게 읽어 내려갔다.
마치 들리지 않는 누군가에게 전하듯이- 그 진실이 아주 늦게라도, 역사 너머로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는 『손끝에 머문 기억-풀잎이야기』중의 1화입니다.
읽어 주셨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