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잇는 인연(上)

by 릿다


"초 사 왔어!"

풀잎이 종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동이는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준비해 놓을게요. 절방에 가서 큰스님께 인사드리고 오세요.“

풀잎은 "고마워!" 하며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법당 쪽으로 걸어가는 동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오늘이 사월 초팔일 아이가! 풀잎아, 얼른 채비해라. 절 가서 등도 달고, 비빔밥도 묵고 하자."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이불을 박차며 풀잎을 흔들어 깨웠다.

"공휴일엔 좀 푹 자게 놔 둬. 엄마 혼자 다녀오시라니까요...“

풀잎은 이불 속에서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엄마는 이불을 확 젖히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가시나야! 백수가 매일이 공휴일인데 무슨 소리고! 얼른 옷 입고 따라온나! 부처님 앞에 가서, 니캉 내캉 기도나 한 판 하자.

취직이든 시집이든 좀 되게 해 달라꼬!”

결국 풀잎은 억지로 끌려 나왔다.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는 운전대를 잡은 채 힐끔힐끔 딸을 살피더니,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취준생, 일자리는 찾고 있나?

비싼 등록금 들여 대학을 졸업했으면, 회사 맛은 좀 봐야 안 되겠나. 안 그러면... 엄마가 선자리라도 한번 알아봐 줄까?“

풀잎은 눈을 감은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시나, 니 이래가꼬 캥거루족 되는 거 아이가?

취직이고 시집이고, 다 젊을 때 해야 되는 기라. 엄마 말, 무슨 뜻인지는 알겠제?“

풀잎은 자는 척하며, 엄마의 잔소리를 라디오 잡음처럼 흘려들었다. 말은 많지만, 정작 자신에게 하고 싶은 진짜 말은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는 그렇게 한참을 달렸고, 어느새 절 주차장에 도착했다.


엄마는 차를 세우자마자 재빨리 문을 열며 말했다.

“내리라!”

풀잎은 마지못해 내렸다.

엄마는 곧장 파마머리에 진한 립스틱을 바른 아주머니들 무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익숙한 억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김여사~ 오랜만입니더! 절에 안 오믄 통 얼굴도 못 보겠십니더. 서보살님, 요즘 병원 다니다 카던데, 몸은 좀 어떻습니꺼?”


수다 삼매경.

엄마는 이미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말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틈을 타 풀잎은 조용히 몸을 돌려 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에 남겨진 엄마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지만, 풀잎의 발끝은 한 박자씩 느리게 땅을 디뎠다.




숲길을 따라 돌계단을 오르자, 절 마당이 시야에 펼쳐졌다.

몇몇 스님들이 사다리를 세워 등을 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풀잎은 절 입구의 우물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 스님이 대야에 물을 받아 손을 씻고 있었다.

물결 위로 햇살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스님... 이 절에서 제일 조용한 곳이 어딘가요?”

풀잎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린 스님이 고개를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풀잎의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스쳤다.

‘어? 저 사람... 민속촌에서 봤던...’


스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 절 어디도 조용하진 않을 겁니다.”

‘말투까지 닮았네...’

풀잎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잠시 망설이던 풀잎이 다시 물었다.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스님은 순간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풀잎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실례합니다.” 하고는 스님의 왼쪽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왜 이러세요?”

어린 스님은 깜짝 놀라 외치며 손길을 급히 피했다. 몸을 뒤로 홱 젖히는 순간, 대야의 물이 튀었고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걷혀진 소매 사이로 자두꽃 모양의 흉터가 선명히 드러났다.


풀잎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여기 있잖아요. 이 표시.”


스님은 눈을 크게 뜨고 풀잎을 올려다보았다.

“...절... 아세요? 어떻게 이걸 아시는 거죠?”

풀잎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스님의 전생을... 좀 안다고 할까요?”

그 말에 스님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가라앉았다. 무언가 말하려던 입술은 닫히고, 짧은 침묵만이 흘렀다.


스님은 말없이 일어나 젖은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절방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풀잎이 소리쳤다.

“그 자두꽃 흉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스님은 순간 걸음을 멈췄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 뒷모습은 곧 분주한 발소리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풀잎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말... 그 사람일까.”




절 식당.

풀잎은 엄마와 엄마의 지인들 사이에서 비빔밥을 먹고 있었다. 엄마는 익숙한 얼굴들과 시끄럽고 유쾌한 수다를 이어갔지만, 풀잎은 말없이 수저만 움직였다.


후식으로 나온 차 한 잔을 들고, 그녀는 조용한 곳을 찾아 자리를 떴다. 법당 옆 별당을 돌아, 햇살이 고요히 내려앉은 마루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잔잔한 바람이 마룻결을 타고 풀잎의 뺨을 스쳤다.

막 찻잔을 입에 대려던 순간,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어린 스님이 나왔다.

풀잎을 발견한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작은 숨을 고르고는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

“팔에 있는 꽃 모양 흉터... 그건 큰스님과 저밖에 모르는데, 불자님은 어떻게 아신 거죠?”

스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풀잎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웃었다.

“그냥... 뭐, 그렇게 됐어요.”

스님은 그녀를 옆에서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흉터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여요. 아무리 불안 해도요.”

“다행이네요.”

풀잎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스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런 말 드리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불자님이 전혀 낯설지가 않네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져요. 도대체... 누구신가요?”

풀잎은 한동안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글쎄요. 저도... 알고 싶어요.”


‘정말, 그때 나에게 족보를 맡겼던 그분일까?’

동이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떠오른 물음이었지만, 그녀는 끝내 말을 삼켰다.




※시간을 잇다 이야기는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이전 02화사주단자-붉은 보자기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