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울

by 릿다



칸사이 공항은 마치 세계 인류 박람회에라도 열린 듯, 각국의 사람들이 뒤섞여 북적이고 있었다.

이국적인 언어들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입국심사 대기줄에 선 풀잎의 귓가에 낯선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줄은 좀처럼 줄지 않았고, 출입국 관리 직원들은 피로가 쌓인 듯한 얼굴로 ”줄을 똑바로 서세요!“ 하고 거칠게 외쳤다.


평소 최고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일본이었지만, 밀려드는 여행객들에게 지친 듯 직원들의 말투와 몸짓에는 거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입국 대기열, 지루함을 달래려 풀잎은 관광 가이드북을 펼쳤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고베항과 이방인 거리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 옆에서 힐끗 책자를 들여다보던 서양 여성이 눈을 찡긋하며 말을 걸어왔다.


"고베, 베리굿. 베리 베리 뷰티풀!"

풀잎도 웃으며 답했다.

"땡규!"

'그래, 내일 고베부터 가볼까?‘


18세기, 세계 열강들이 일본과 강제조약을 맺고 들어와 점령지를 형성하면서 만들어진 고베 이방인 거리는, 그 시기의 건축물과 가구, 생활용품들까지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좁은 골목들 사이사이로 이슬람 사원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 시설이 자리잡고 있어 더욱 인상 깊었다.


고베항 쪽으로 내려가며 스타벅스에서 아이스커피를 테이크아웃해 거리를 걷는다. 무언가를 먹으며 걷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인.

'일본사람들은 거리에서 음식을 잘 먹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눈앞에 고베항이 펼쳐졌다.


관광 안내 책자를 펼쳐,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헬기에서 사격해 남겼다는 탄흔이 있는 건물을 찾아 손으로 그 자국을 더듬었다. 움푹 패인 흔적이 분명히 보였다. 그 옆에는 ’6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책자에 따르면 이는 67번째 총알이라는 의미였다.


바로 옆에는 18세기 우정국, 즉 당시의 우체국 건물이 있다기에 들어가 보았다. 입구를 지나자 나선형 계단이 위층으로 이어져 있었고, 1층에는 아무도 없어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5층에 이르자, ’옛 우정국 사무실‘이라 적힌 문이 보엿지만 굳게 닫혀 있었다. 문손잡이를 살짝 돌려 보았지만 잠겨 있어 열리진 않았다.


다시 안내 책자를 펼쳐보니, 이 우정국은 5층 사무실에서 1층까지 대형 원통형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어 배달부가 굳이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된 건물이라 적혀 있었다.

’와! 정말 합리적이네.‘


감탄하며 옆을 돌아보니, 실제로 1층까지 뻗은 원통형 통로가 벽에 붙어 있었다.

풀잎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1층으로 향했다. 위층을 올려다보며, 우편물이 5층에서 통로를 따라 흘러내려와 도착했을 마지막 지점을 더듬듯 찾아보았다. 그러다 1층 오른쪽 구석 벽에서 작은 문 하나를 발견했다. 조그맣지만 손잡이가 달려 있어 당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문은 덜컥 열렸다.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시절, 제법 부피가 있는 우편물도 이 통로를 따라 내려왔던 모양이다.

’신기하네... 그 땐 어떤 우편물이 배달됐을까? 편지가 대부분이었겠지?!‘

풀잎은 혼잣말을 하며 손을 안으로 뻗었다. 손끝에 무언가가 스쳤다. 조심스럽게 움켜진 손을 꺼내보니, 낡은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봉투에는 일본어로 주소가 적혀 있었고, 이름은 한글로 ’이아야‘라 적혀 있었다. 풀잎은 스마트폰 번역 앱을 켜서 주소를 인식시켰다. 번역 결과,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츠카구치 3쵸메‘ 라는 지명이 떴다. 우표 위에는 ’1944년 7월 16일‘이라는 직인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뭐야?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남겨진 편지인가? "


풀잎은 혼자 중얼거리며 편지를 다시 제자리에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이아야‘라는 이름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 재일교포였을까?

잠시 망설이던 풀잎은 편지를 가방에 넣었다. 효고현 아마가사키시는 머물고 있는 오사카와 멀지 않았다. ’중간에 들러볼까‘ 혹시 주소지를 찾으면 편지의 주인을 알수 있을지도 몰라.’


곧 한큐 전차를 타고 쯔카구치역에서 내렸다. 마침 역에 도착하니, 아까까지 내리던 소나기도 말끔히 그쳐 있었다. 역 앞에는 빵집, 약국, 던킨도너츠 같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바삐 움직이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풀잎은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모서리마다 붙은 주소판을 확인하며 걷던 중, 북오프 매장에 쓰인 ‘쯔카구치 1쵸메’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풀잎은 발걸음을 더 옮겼다.


거리는 점점 조용해졌고, 주택가로 접어들면서 3층짜리 단독주택과 오래된 단층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검게 옻칠된 일본 전통 가옥의 나무 담장이 깊은 운치를 자아냈다. 마치 관광 책자 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그 담장은 잘 말린 긴 나무판을 불에 그을리고 다시 말려 옻칠한 뒤, 흙벽을 따라 둘러붙인 구조였다. 직접 마주한 일본의 정취에 풀잎은 ‘역시 오길 잘했어.’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담장을 따라 걷다 보니 아래쪽에 수국이 길게 심어져 있었다. 청보라, 자주, 분홍, 연분홍, 흰색, 옅은 노란, 붉은빛까지...

다양한 색의 수국이 검게 그을린 담장을 배경으로 수채화처럼 이어져 있었다. 방금 전 쏟아진 소나기의 물방울이 꽃잎과 잎사귀에 맺혀, 수국들은 막 피어난 듯 생기가 넘쳤다.

각기 다른 색으로 피어난 수국들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뽐냈고, 풀잎의 입가에서는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수국 하면 일본이라더니, 정말 맞는 말이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한 골목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섰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눈앞에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주택가의 넓은 길이 펼쳐졌다. 오른편 높은 담벼락 너머로는 커다란 종이 달린 절이 보였고, 그 맞은편 왼쪽에는 고풍스러운 저택이 넓은 터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저택의 깊은 정원 너머에서는 매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풀잎이 서 있는 바로 맞은편, 절과 저택에 비해 한없이 소박한, 작은 목조건물이 있었다.


그 집은 어딘가 눈길을 끄는 구조였다. 1층엔 현관문 하나만 있었고, 2층에는 나무 창틀을 덧댄 직사각형 창문이 길 쪽으로 나 있었다. 현관과 2층 창, 이 두 곳이 집의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처럼 보였다.

풀잎이 그 집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순간, 불쑥 2층 창문이 열렸다. 유카타를 입은 어린 소녀가 창틀에 걸터앉더니,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소녀의 청아한 노랫소리는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처럼 시원하게 퍼져 나갔다. 그 부드럽게 낮게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에 이끌리듯, 풀잎은 소녀 쪽으로 다가갔다.

창가 주변에도 수국이 만개해 있었다. 방금 전 소나기의 물방울이 꽃잎과 잎사귀에 촘촘히 맺혀, 수국들은 막 피어난 듯 싱그러웠다. 풀잎은 창가에 앉은 소녀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츠카구치 3쵸메 맞나요?“


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녀는 풀잎을 보고 놀란 듯 노래를 멈췄다.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네... 맞아요.“

풀잎은 등에 멘 가방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들어보였다.

”이아야 씨, 혹시 알고 있니?“


그 순간, 머리 위에서 ’툭‘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수국 사이로 떨어졌다. 풀잎은 조심스레 그 물건을 주워 들었다. 그것은 양쪽에 작은 방울이 달린 머리끈이었다.

붉은색, 검정, 초록 비단 조각이 색색으로 이어진 방울 주머니는,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마감된 정교한 바느질이 인상적이었다. 이음새는 검은 비단으로 둥글게 말아 띠를 두른 모양이었고, 그 섬세함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선명한 원색 때문인지, 섬세한 바느질 솜씨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방울이 달린 머리끈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귀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풀잎은 손안의 방울을 살며시 흔들며 물었다.

”이 방울, 네 거니?“

소녀가 창틀에서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럼... 이아야 씨가 누군지 알아?“


풀잎의 물음이 끝나자, 소녀는 몸을 일으켰고 곧 계단을 후다닥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1층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급히 내려온 탓인지 긴 머리가 흐트러져 얼굴에 흩날렸고, 양볼에는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정말... 이아야 씨를 아는 거야?“ 풀잎이 다시 물었다.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풀잎이 편지를 건네자, 소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감추려 하지 않고 그대로 편지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오빠한테서 올 거예요...“

소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방울이 달린 머리끈을 풀잎에게 내밀었다.


”언니, 머리 좀 묶어 주세요. 오빠가 준 방울을 달고 편지를 읽고 싶어요.“

그 수줍은 부탁에 풀잎의 입가에는 저절로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소녀와 함께 현관 입구의 툇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신발장 위에 놓여 있던 참나무 빗을 집어 들고, 풀잎은 소녀의 머리를 천천히 빗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한 손으로 모으기 어려울 정도로 풍성했고, 칠흑처럼 검은 머릿결은 부드러운 윤기를 머금은 채 빛났다.


”머리에서 좋은 냄새가 나네.“ 풀잎이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녁밥 지을 때 받아놓은 쌀뜨물로 머리를 감았어요.“

풀잎은 소녀의 머리카락을 정수리 위로 모아 올리고, 방울이 달린 머리끈으로 조심스럽게 묶었다. 순간, 묶인 머리 아래 드러난 소녀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창백하면서도 단아한, 어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아름다움이 한순간 스쳐 지나갔다.


소녀는 머리를 다 묶은 뒤 풀잎 쪽으로 돌아앉았다.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으며 말했다.

”... 집에 더는 먹을 게 없어서 오빠가 군에 들어갔어요. 떠나기 전, 오빠가 이 방울을 주면서, 이걸 머리에 달고 있으면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어요. 동무들은 다 예쁜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는데, 저만 천 조각으로 묶어서 자주 놀림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 예쁜 방울을 받았을 때, 정말 너무 기뻤어요...“


편지를 뜯던 소녀의 조심스러운 손놀림이 잠시 멈췄고, 두 손이 무의식적으로 방울을 매만졌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방울이 정말 잘 어울린다. 이렇게 예쁜 방울은 나도 처음 봐.“

풀잎의 말에 소녀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소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본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배급 쌀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빠가... 나이를 속이고 군에 들어간 거예요. 얼마 전, 쌀과 편지를 보내왔고 곧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 뒤로는 아무 소식도 없어요. 오빠도 돌아오지 않고... “

소녀의 목소리는 떨림을 꾹 눌러 담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창가에 앉아 오빠가 빨리 돌아오라고 노래를 불렀어요. 동무들이 그러더라구요. 이 노래를 부르면 기다리는 사람이 빨리 온다고...“

소녀는 봉투의 봉인을 다 뜯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편지를 풀잎에게 건넸다.

”떨려서... 못 읽겠어요. 언니가 대신 읽어 주세요.“


풀잎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 펼쳤다. 익숙하지 않은 일본어 글자들 사이로, ’전사(戦死)‘라는 단어 하나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풀잎은 편지를 소녀 손에 조심스럽게 되돌려주었다.

편지를 받아든 소녀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니야... 꼭 살아서 돌아온다고 했어요. 이 방울을 달고 있으면...“

방울 소리를 확인하듯 소녀는 머리를 몇 번 흔들었다. 그러곤 풀잎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는 작지만 깊었고, 마치 오래 참고 눌러왔던 그리움이 터진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맑고 하얀 얼굴이 조용히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소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고도 아름다웠다.

”고마워요.

이제... 오빠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소녀는 풀잎을 향해 살짝 미소 짓고는, 조용히 문안으로 들어갔다. 소녀가 집 안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시간이 꽤 흘렀다는 생각이 든 풀잎은 전차 시간표를 주머니에서 꺼내보았다.

팔목시계를 확인하니, 다행히 다음 전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표를 다시 접어 넣으며, 풀잎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소녀와 그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바람에 부서진 나무 파편과 깨진 기와 조각들뿐. 잡초 속에 흩어진 그것들 위로, 불타는 듯한 붉은 노을이 쏟아져 내리며 모든 것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풀잎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손안에 작은 방울이 조용히 쥐어져 있었다. 소녀가 문 안으로 사라진 그 순간, 바람처럼 스며든 듯, 어느새 풀잎의 손에 남겨진 것이었다.


저녁 노을빛 속에서, 방울은 고요히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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