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역 3번 출구 계단을 숨차게 올라, 풀잎은 위니아 카페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모범생 동이는 벌써 와 있었다.
풀잎을 보자 동이는 환한 얼굴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닌데, 풀잎은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 위엔 이미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풀잎은 계산대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으며 하나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일찍 온 거야? 괜히 미안하네.”
동이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 안 됐어요.”
풀잎은 그의 잔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근데 잔이 비었네?”
동이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얼른 덧붙였다.
“블랙커피 좋아하는 거, 누나도 알잖아요.”
풀잎은 다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입대한다고? 긴장되지?“
동이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누나가 더 긴장한 것 같아요."
풀잎은 허탈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쭈! 농담도 하고? 여유롭다 이거지? “
동이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 동이는 승복 대신 사복 차림이었다. 낯설 만큼 평범한 옷차림에, 그는 어린 대학 초년생처럼 보였다.
둘은 저녁을 함께 먹고 홍대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다 분수대 근처에 자리를 잡고, 거리 공연을 감상했다. 잔잔한 통기타 소리에 맞춰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주말 저녁답게, 손을 맞잡거나 팔짱을 낀 커플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로 거리는 복적였다.
그때였다.
젊은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던 중, 아기가 손에 쥔 인형을 툭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작은 아기곰 인형이었다.
풀잎은 얼른 몸을 굽혀 인형을 집어 들었다.
“저기요. 인형 떨어뜨리셨어요.”
그녀는 유모차를 멈춘 엄마에게 다가가, 아기의 손에 인형을 다시 꼭 쥐여주었다.
아기는 뭐가 좋은지 방긋 웃으며 유모차를 발로 찼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옹알이를 내뱉었다.
“고마워요. 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인데, 잃어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젊은 엄마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유모차를 밀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풀잎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동이 옆에 조용히 앉았다. 동이는 여전히 멀어지는 유모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풀잎은 그 시선을 따라가다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토실토실한 아기, 정말 귀엽더라!
울 동이 스님도 아기 때는 얼마나 귀여웠을까...?”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웃으며 덧붙였다.
“젖병 들고 있다가도 가끔 명상에 잠겼다고, 큰스님이 그러시더라. 그때부터 눈에 들어왔대. ‘아, 뭐가 돼도 될 놈이다.’ 하고 말이지.”
풀잎은 웃으며 동이의 반응을 살폈다.
동이는 잠시 풀잎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엄마가... 그리웠나 보죠.”
예상치 못한 말에 풀잎은 순간 당황해 서둘러 말했다.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야. 미안해... ”
동이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풀잎을 바라보며 잔잔히 웃었다.
“알아요. 누나 마음은... 알아요.
그냥... 사람들이 다 가진 가족이 왜 나에겐 없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한 번 더 풀잎을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첫 장면은, 엄마 보고 싶다고 울다가 큰스님께 혼난 일이에요. 속세의 인연이 짧아 절에 들어왔으니, 마음을 모질게 먹고 업장 소멸을 하라고 하셨지만...
어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서러웠어요.”
동이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초등학생 때도 절에 산다고 아이들이 놀렸어요. 그중에 ‘부모 없는 아이’ 라는 말이 가장 깊게 가슴에 박혔던 것 같아요.
학교 소풍이나 학부모 참관 수업에도 큰스님이나 다른 스님들이 와주셨지만...
내 마음 한구석엔 늘 ‘그리움’이라는 빈자리가 있었어요.”
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거리의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텅 빈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는 걸 느꼈어요. 무언가 그리워서 허전했던 그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 누나를 만나고부터였을까요.
아니면, 누나가 내 팔에 있는 꽃잎을 상기시켜 주고부터였을까요?”
동이는 얼굴을 다시 돌려 풀잎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그 순간, 풀잎은 말없이 팔을 벌려 그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동이의 등을 조용히 쓸어주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