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by 릿다


설국처럼 눈으로 뒤덮인 절 마당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풀잎은 깡충깡충 절방으로 들어섰다.


마루 앞 댓돌 위에 놓인 동이의 털신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풀잎은 그 눈을 조심스레 털어내고, 젖지 않도록 마루 끝 구석에 살며시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마치 방금 도착한 사람처럼 방 앞에 서서 소리쳤다.


“동이 스님!”

풀잎의 부름에 문이 금세 열리더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동이가 나왔다.

"큰스님은 안 계셔?“

동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안거 들어가셨어요."


풀잎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입학 축하 선물! 한의대 입학, 정말 축하해.“

동이는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문질렀다.

"가방이랑 신발이야. “

그는 잠시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있다가, "잘 쓸게요 "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종이가방을 내려두고, 방석과 다기 세트를 들고 나왔다.

풀잎은 그런 동이를 툭 치며 짓궂게 웃었다.

"나도 여자라고, 방엔 못 들이겠다 이거지?”


동이는 순간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큰스님도 안 계신데, 괜한 오해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풀잎은 후후 웃으며 동이를 바라보았다. 동이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내밀었다.

"많이 추우세요? “

풀잎은 찻잔을 두 손에 감싸며 대답했다.

"아니, 눈이 와서 그런지 더 포근한 것 같아. 그런데... 한의학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던 거야?“

동이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말했다.

"생각이라기보다는... 느낌이었어요. 익숙한 학문을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 뭐라 설명하긴 어렵네요."

풀잎은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동이가 입을 열었다.

"일전에 부탁하셨던 꽃신은, 큰스님이 불공을 올려주셨어요. 그리고 저랑 같이 태워서 땅에 묻었는데... 업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큰스님이 그러셨어요.“


풀잎은 두 손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잠시 머뭇거리던 동이가 물었다.

"그런데 누나는 왜 물건을 다 불에 태워요? 그중에는 꽤 귀한 골동품도 있던데..."


그 말을 들은 풀잎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동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절 마당으로 돌렸다.

"... 내가 사연 있는 물건들과 인연을 맺게 된 건, 누군가 그 물건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면서부터였어.

그 사람은 세상에 그 물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거든.

그래서 불에 태웠지. 사실은 그 사람을 무거운 인연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어.

물건의 형체도, 거기에 담긴 기억도 함께 불 속에서 타서 재가 되어 사라지면... 그제야 그 사람이 진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풀잎은 마당 위를 사뿐히 맴도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인간의 망각은 신이 내린 축복일까, 아니면 벌일까?”


동이도 눈 내리는 마당을 함께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축복 아닐까요. 너무 많은 기억은 결국 뒤엉켜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것 같아요.”


풀잎은 남은 차를 끝까지 비운 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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